번역을 하게 된 뒤로 내가 출판사나 에이전시 사람들과
연락을 하거나 만나면 가장 많이 듣는 호칭이 '선생님'이다.
나는 누구를 가르치지도 않고, 어느 학교에 있지도 않은데
'선생님'이라니... 처음에는 '선생님'이란 호칭이 참 어색했다.
물론 중한번역, 그 중에서도 출판번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번역사님이나 번역가님, 작가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걔 중에 가장 만만한 호칭이 아마 '선생님'인가 보다.
사실 이 중에 내 마음에 가장 편한 호칭은 번역사나 번역가다.
누가 들어도 직업을 알려주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가끔 작가님이라고 하는 출판사도 있는데 책을 번역하는
사람을 '번역 작가'라고 하니 아주 틀린 호칭도 아니지만
내가 무슨 글을 쓰는 작가도 아닌데 '작가'라니, 그 호칭 역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선생님'이나 '작가님'이라고 하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책임감이 몇 배로 늘어나는 것만 같다.
물론 번역가로 15년 가까이 살다 보니 이제는 뭐라 부르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선생님'은 부담스러우니 '번역가'로
불러달라고 하는 것도 어쩐지 까탈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어쨌든 나는 '선생님'으로 가장 자주 불리지만 문제는
아는 것도, 잘하는 것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책 한 권을 번역하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같은 말들이다. 한 집에 사는 우리 어머니도 "야,
무슨 번역가가 그렇게 모른다는 소리만 하냐?"라고
하실 정도다.
흔히 번역을 한다고 하면 책을 보자마자 술술 읽고, 번역도
사전 하나 찾지 않고 척척 해낼 것이라고 상상하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정반대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찾아야 할 단어는 산더미다.
게다가 번역가는 만능이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작업하게 될 때도 많다. 그럴 때면 인터넷을 통해
자료조사를 해야 할 때도 많고, 그렇게 해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글을 쓴 작가에게 직접 문의 메일을 쓰기도 한다.
한번은 질문을 너무 많이 했다 작가에게 "그 번역가는
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번역가를 바꿔야
하는 것 아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물론 번역가마다 스타일이 달라서 모르는 부분이 있어도
혼자 낑낑대며 고민하는 번역가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독자의 이해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꼭 확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쓴
작가를 괴롭혀야지 글을 읽는 독자를 괴롭게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되게 쓰거나
어려운 말로 미사여구만 잔뜩 쓰거나 지나친 은유로 글을
개떡(?) 같이 쓴 작가들을 보면 성질이 날 때도 있다.
독자들이 말짱하게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해야 하는 것은
내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글을 개떡(?) 같이
썼노라고 인정하는 작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무튼 이렇게 모르는 것들이 천지인 글들과 씨름을
하다 보면 자괴감이 들 때가 많다. '어째서 나는 아는 게
이렇게 많지 않을까? 내가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소질이
있는 게 맞나?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리를 스친다. 15년 가까이
번역을 하고, 출간된 책만 수십 권인데도 여전히 이런 것들이
고민이라니 내 머리가 유난히 나쁜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번역에 대한 고민이 많으면 이 일을 때려쳐야
하는 건 아닌가?'라는 고민도 한다. 남들은 번역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그럴 듯한 강의도 한다는데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확신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더군다나 나는 중국어 전공자도 아니고, 남들에 비해 중국어를
배운 기간도 짧은 편이라 더 그런 자격지심이 드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기를 쓰고 다시 기획안을 쓰고, 새로운 책을
한 권 한 권 번역할 수 있는 건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는 게 이거 밖에 없어서
이 나이에 먹고 살 만한 다른 직업을 찾기가 쉽지 않기도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에 관심이 많고, 누군가의
문화를 좋아하며,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는 걸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해외 여행을 가면 멋진 해변은 안 가도 크든 작든
그곳의 박물관은 꼭 찾아간다.
이런 성향을 보면 번역과 찰떡인 것 같기도 한데 하루에도
몇 번씩 속이 뒤집어지고,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나처럼 느리고 게으른 사람이 '시간 약속이 중요한
번역과 어울리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 나를 다잡아주는 것은 잘하고 있다는 주위의 칭찬이다.
"번역사님처럼 기획안을 꼼꼼하고 열심히 쓰는 사람은 못 본 것
같아요."라고 말해주는 에이전시의 차장님이나 "선생님, 기간
잘 맞춰 주시고 열심히 번역해주셔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출판사 에디터나 '번역이 글을 더 돋보이게 해준 것 같아요.'라고
리뷰를 써준 독자의 글을 만날 때 '그래,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야지.'라는 마음을 다시 다지게 된다.
가끔은 어떻게 알았는지 내게 직접 메일을 보내 번역을 한 수
배우고 싶다는 독자도 있다. 그럴 때는 역시 내가 하는 일을
허투루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나는 이토록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이 일을 좋아하기에,
칭찬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매일 흔들리면서도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선생님이라기에는 그 어떤 확신도, 해박한 지식도 없지만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는다. 또 하루 종일 "뭔 말인지
모르겠다."를 연발하겠지만 다음 주 마음 먹은 날까지
열심히 번역을 해봐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칭찬 한 스푼을 보태면 그래도 끝까지
달려볼 수 있으리라. "잘하고 있다. 넌 충분히 잘하고 있다."
나 자신을 인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