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나는 보통의 소심한 사람들이 그렇듯 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평소 번역이 바쁠 때는 사람도 만나지
못하다 작업이 하나 끝나야 옛 친구들을 가끔씩 만나곤 한
다. 내일 만날 친구들은 대학 때 친구들인데 둘 다 재수를
한 터라 나보다 한 살이 많지만 동기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반말을 하며 허물없이 지낸다. 아무튼 내일 만남을 위해
우리는 약속을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한 번은 우리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맹장염 수술 때문이었고, 다음은 친구네 이사 문제
때문이었다.
작년 연말부터 보자고 했는데 약속이 자꾸 바뀌어 1월 말이나
되어 보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른 친구 하나가 바빠
내일도 제때 만날 수 있을지 간당간당하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안 보고 싶어도 매일 봐야 하는 사이였는데 나이를
먹으니 맘 먹고 보려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사실 30대만 해도 이렇게 약속이 자주 바뀌거나 어그러지면
기분이 상할 때가 많았다. '누군 안 바쁜가? 약속을 했으면
지키려고 노력을 해야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40대 중반이 되고 보니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다음에 보면 되지' 이렇게 편히 생각하게 됐다.
어릴 때는 무조건 함께 하는 것이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친구가 잘못해도 무조건 친구 편을 들어줬다.
어릴 때는 자주 봐야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서로 숨기는 것이 없어야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서로의 아픔을 나눌 수 있어야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친구는 각자의 생활을 존중하기에 무조건 함께 하지 않아도
된다. 친구는 잘못을 했을 때 그 잘못을 지적해주며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도닥여 줄줄 알아야 한다.
또한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익숙한 사이다.
친구는 서로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은 모른 척 눈 감아줘야 한다.
무엇보다 친구는 무작정 아픔을 나누겠다며 눈물을 흘릴 게
아니라 친구의 표정을, 마음을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최근 친구들에게는 크고 작은 사건과 고민들이 생겼다.
물론 내게도 그런 일이 있으리라. 하지만 나이를 먹은 뒤로는
친구의 사정이 어떻게 됐는지, 고민은 해결됐는지 먼저
나서서 묻지 않게 됐다. 어쩌면 그것은 친구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명목으로 알량한 나의 호기심을 채우는 일일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모르는 척 한 발 물러나
아무 것도 묻지 않게 됐다. 친구에게 혼자 고민하고,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면 온전히 친구의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친구가 먼저 속을 털어 놓으면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고, 보이지 않는 손을 내밀면 눈치 빠르게
잡아주려 한다.
서로 바쁜 일상에 치여 일 년에 고작 2, 3번 보는 게 전부인
친구들이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본 거 같고, 좋은 일은
함께 기뻐해주며, 숨기고 싶은 고민은 적당히 모르는 척
해주고, 슬쩍 손을 내밀면 잡아줄 친구들이 있어 참
다행이다. 나이가 먹는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늘어나는 주름의 수만큼 친구를 대하는 내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고, 나보다 친구의 입장이나 마음을 헤아리게 됐으니
말이다. 물론 여전히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서로에게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좁고도 깊은 관계를 맺은 친구가 있다는 건
무척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