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책장

꿈이야기 04

by 산책가


방 안의 세 군데 벽이 다 눈부신 책장으로 가득하다. 책장 안에는 빼곡하게 책이 꽂혀있다. 서로 다른 높낮이와 서로 다른 디자인과 색상의 책들의 조화가 얼마나 눈부신지.


밖에서 일을 보고 집에 귀가한 지금 시간은 밤 10시쯤 된 것 같다. 내일 아침이면 공항에 가야 한다. 다른 나라의 학교에서 또 공부를 하게 되어 떠나야 하는 날이다. 예전 실제 유학 가는 전 날의 그 기분, 설렘과 불안함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세상에 짐을 하나도, 정말 하나도 안 싼 거다. 이럴 수가.

그 순간, 꿈을 꾸면서도 이게 꿈이란 것을 눈치챘다.

난 완전 대문자 J이다. 나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어렸을 때부터 내일 아침에 학교 갈 때 입을 옷, 책가방, 준비물 등 모든 것이 다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지금은 자려고 누워서 내일 아침은 애들은 뭐를 먹이고 나랑 남편은 뭐를 어떻게 먹어야지 등부터 시작해 하루 종일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준비하고 계획한다. 수첩에도 빼곡하게 적어두기까지 한다. 그런데, 당장 내일 몇 년을 살 해외로 떠나면서 트렁크 하나도 짐을 안 쌌다고? 극한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내 사방에 꽂혀있는 책이 눈에 들어온다. 저 책들을 다 놓고 갈 수는 없는데? 흠. 다 가져갈 수 없으면 어떤 책들을 가져가야 하지? 이 책 저 책... 가져갈 책을 눈길로 고르면서 동시에 저 책이 트렁크에 다 들어가긴 할까? 그리고 가져가지 못한 책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순식간에 고민이 산같이 쌓인다.

이렇게 불안할 수가 없다. 미치기 일보직전이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지금 살고 있는 이곳도 내 나라가 아니었다. 여기서 또 다른 나라로 예정대로 가야 할지, 아님 일단 일정을 미루고 여기 짐 정리를 어떻게 먼저 좀 해야 할지, 애라 모르겠다 식구들 있는 우리나라로 그냥 일단 돌아갈까? 그럼 저 책들은 어떻게 해? 막 혈압이 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냥 화장실도 막 가고 싶은 것 같다. 초조해서.


그러다 이내 일단 집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좀 알아보고, 이미 예약되어 있는 비행기표를 취소해 보자. 먼저 새로운 티켓을 끊고, 그다음에 기존 티켓은 취소하자 등 나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순서에 따라 막 손가락을 움직이며 핸드폰 항공 부킹 앱을 조작한다. 바로 전날 비행기 예약, 당연히 표가 하나도 없다. 어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열이 오른 채 얼굴을 들었다.

책장이 늘어났다. 책도 더 많이 늘어서 방바닥에 까지 쌓여있다. 내가 책에 깔리지 않은 게 다행인 듯하다...




띠링~ 문자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꿈속, 잔뜩 늘어난 책들에 기겁을 하던 순간이었다.

"투데이 택배 - 소중한 물품을 배송 완료했어요.... 말뚝들 외 6권..."

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당일 배송이 좀 늦어져 12시를 넘겨 문 앞에 왔나 보다.

오후에 책을 보다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 소설책, 역사책 등등 7권의 책을 당일 배송으로 주문하고 식구들 다 잠드는 시간에 맞춰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든 사이였다. 요즘은 주문을 하면 배송이 너무 빨라 잠깐 생각을 하고 취소를 할까 싶어 앱을 다시 열어보면 이미 배송이 시작된 상태가 부지기수였다. 오늘도 주문한 7권 중 3권은 취소할까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서재방 책상의 컴퓨터와 모니터 주변과 왼쪽 벽 그리고 뒤쪽 벽은 온통 책으로 덮여있다. 거실에도 텔레비전을 벽 높이 고정 설치하고, 벽을 가득 채우며 옆으로 그리고 텔레비전 위치를 피해 위로 쭉 높게 펼쳐진 책꽂이를 설치했다. 거실에는 띄엄띄엄 두 군데 테이블에도 작은 책장이 꾸려져 있다. 책을 더 이상 둘 곳이 부족해 여기저기 겹쳐 쌓아 두었다.


올봄에 한 권, 그리고 여름에 한 권. 번역서가 나왔다. 고대 철학과 브랜딩 디자인 관련된 책들이다. 실제로 작년 말부터 올해 상반기에 번역한 책이 6권이다. 그 6권을 번역하기 위해 사다 모은 책들이 몇 십 권이 된다. 하지만 결국 번역할 책과 관련된 내용의 참고 서적들이다.

한참 번역과 집필 작업을 할 때는 맘 편하게 그냥 읽고 싶은 책은 잘 못 읽게 된다.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이번 여름 방학 동안에는 번역 작업을 일찌감치 마무리하고 근근이 쓰면서 특히 읽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지난 두 해동안 연구사업 지원금을 받아 산 책이 150권쯤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올여름 방학이 시작되면서 또 책을 사기 시작했다. 맘먹고 책을 읽자 하니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고 싶은 책이 늘어났다. 당연히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갈 리 만무하다.


언젠가는 또 이사를 가야 할 텐데... 무의식에 이 책들이 짐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을 한다. 웃긴 건 책을 살 때마다 사고 나서 그 걱정을 하기는 한다는 거다. 금세 잊어서 그렇지. e북을 자주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책의 물성이 좋다. 자꾸 이 책들이 집 안에 쌓여가는 만큼 내 머릿속에 쌓여야 할 텐데. 언젠가는 이 책에 깔려서 헥헥 거리는 꿈을 꿀 것도 같다.


그나저나 개강이다. 방학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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