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장소에서 평범한 첫 만남
동물을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 대답하겠다. 오히려 스스로 못 견뎌 오도방정을 떨 정도로 좋아하는 편에 가깝다. 하지만 이것저것 공부하고 신경 쓰고, 나보다 기대수명이 짧은 동물의 일생을 온전히 책임지는 건 어깨가 무거운 일이다.
어릴 때엔 시골에 살아 마당에 개들을 많이 길렀었다. 통칭 '흰둥이'로 불리는 흰색 진돗개들이다. 흰둥이들은 아기를 낳았다. 그러면 젖을 떼고 아장아장 걷거나 어설프게 뛰어다닐 때쯤 한 마리를 빼고는 분양을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대 흰둥이까지 봤는지는 모르지만, 그 모두를 흰둥이라고 불렀다. 흰둥이들은 반려견의 개념보다는 마당을 지키는 개라 일평생 짧은 쇠사슬에 묶여 살아야 했다.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산책을 시켜주긴 했지만 쇠사슬조차 무거운 미취학 아동의 힘으로 커다란 개를 산책시키는 건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투박한 쇠사슬의 끝을 간신히 잡고 매달려 있으면 흰둥이들은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흙길을 마구 내달렸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가 흰둥이도 웬만큼 즐긴 것 같고 나도 힘들어질 때면 흰둥이를 달래 집으로 향하곤 했다.
햄스터를 기른 적도 있다. 초등학생 때 일이었다. 그때는 작은 아크릴 케이지에 톱밥을 깔고 휴지심과 쳇바퀴를 넣어주는 것만으로도 햄스터의 복지가 완성되는 시절이었다. 햄스터는 큰 우리에 혼자만 길러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인터넷이 발달한 때도 아니었고, 햄스터에 대한 복지는 더더욱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라 '외롭지 않도록 두 마리를 사야 한다'는 소동물마트 직원의 말에 따라 두 마리를 길렀었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번식왕 햄스터는 끝도없이 아기들을 낳았다. 작은 아크릴 우리로 시작한 햄스터 기르기는 큰 리빙박스로 이어졌다. 많은 햄스터들을 분양보내고 친구들 중에서 가장 오래 대대손손 기르다가, 마침내 수컷 햄스터 한 마리만 남아 햄스터 집안의 대가 끊겼다. 마지막 햄스터는 '왕자님'이라고 부르며 특히나 극진히 대접해드리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생물 수업에 사 오라고 했던 금붕어 두 마리의 이름은 '보글이'와 '부글이'였다. 신경을 많이 써준 것도 아니었는데 오래도록 집 안 어항에서 헤엄치다가, 내가 고등학생 생활을 하던 어느 날은 부글이가 인공 수초 사이로 숨어 비실거리며 아픈 기색을 보였더랬다. 그때 처음으로 금붕어도 아플 수 있다는 걸, 그걸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특별히 해준 것이 없어 더 미안했던 나는 죄책감에 울었지만 금붕어 진료를 봐주는 동물병원도, 그걸 감당할 자본도 없었다. 노화로 인한 기력 저하는 병원에 가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도 알았다. 나의 늙은 금붕어들은 그렇게 지구어항 탐험을 마치고 용궁으로 떠났다.
아무리 어려도, 헤어짐은 언제나 슬픈 법이다.
어릴 때에도 생명을 가볍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성인이 되어 돌이켜보니 내 어린 시절을 함께해준 동물들에게 애정은 주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정성은 모자랐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렸을 때라, 정보가 없을 때라 하고 변명을 해봐도 스스로를 질책하는데 도가 튼 INFP는 점점 동물에겐 정을 주지 않고 마음을 걸어 잠그기에 이르렀다. 무식은 죄다. 작은 동물에게 베푸는 작은 호의에도 책임이 따른다. 나의 호의가 동물에겐 악의일 수 있다. 지식이 없으면 예뻐하지도 말자. 눈길이 가더라도 정은 주지 말자. 책임지지 못할 일은 벌이지도 말자. 완벽하지 못할 거면 시작도 말자.
대학 졸업 후 3년간의 첫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탱자탱자 놀다가 돈이 궁해진 나는 놀이동산 아르바이트를 지원하게 되었다. 놀이동산을 떠올린 이유는 특별한 게 없다. 내 전공으로 할 수 있는 특색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 광역버스를 타고 가며 검색해 정리해두었던 내용들을 훑어보았다. 그 중 면접정보 보다도 내 가슴을 뛰게 만든 문장이 있었다.
<기숙사에는 고양이가 있어요. 애교도 잘 부려요.>
나는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