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래도 당신의 마음은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나요?"
하얀 햇살이 조를 깨우러 온 아침, 평소였으면 하얀 햇살의 두 손이
눈꺼풀을 간지럽히도록 조는 자는 척을 했겠지만 (실제론 자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햇살이 좀 늦은 것 같다. 조는 이미 두 눈을 뜬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교수도,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그리고 조도 예상은 했겠지만 어제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누가 그런 버라이어티 한 하루를 보내고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자려고도 해봤다. 가브리엘도 오늘 그만 생각 말고 잘 자라고 했으니까 잘 자려고 했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해야 하는 내일을 위해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 대개는 푹 잠들 수 있으니 욕조 안에 몸을 푹 담그기도 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몸은 깨끗해질지 몰라도, 머리는 도무지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가서 퍼즐을 찾아야 하는 걸까?
어렵게 찾아서 WORDWORLD에 가면 정말 아빠를 만날 수 있는 걸까?
아빠는 정말 WORDWORLD에 있긴 한 걸까? 가브리엘은 어쨌든 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곳은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캡틴 로버트가 그랬으니 맞는 얘기일 거다. 막상 갔는데 아빠는 없고, 나만 그 안에 갇히면 어떡하지. 그럼 엄마는 나마저 잃게 되는 건데.. 그럼 안되는데..
아니! 이러면 안 된다. 나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처음으로 aika 마을을 벗어나 나 홀로서기를 막 시작한 역사적인 여행을 나쁜 생각으로 물들일 순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것이 두려워 aika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마스터피스에 도전도 못해볼까 두려워 뭐라도 찾고자 떠났던 게 아닌가? 그렇다면, 뭐라도 해야 한다. 이렇게 호텔이 불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정말 포근하긴 하다.)
.
.
일어나서 깨끗하게 씻고.. 호텔 조식은.. 먹을 시간이 지났다 �
그럼 일단 나가야겠다. 나가서 가장 먼저 뭘 해야 하지?
(먹어야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조는 다시 한번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배에 손가락을 들고 경고를 했다. (넌 잠깐 있어봐!)
Q. 머리야, 가장 먼저 뭘 해야 할까?
A. 퍼즐부터 찾아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퍼즐부터 찾아야지. 퍼즐은 그런데 어디 가서 찾지?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
흠........... 그렇지. 가브리엘에 가서 물어봐야지!
#
"교수님!!! 가브리엘 교수님!!!! " 휴, 3시간 기다리다 겨우 찾았네.
"오, 조 라이터. 어제는 잘 잤어요?" 진심으로 물어보시는 건가요, 교수님?
"어디 가시는 길인가요, 교수님?" 가브리엘의 팔에 한 움큼 든 파일을 보며 묻는다.
"아,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알아봐야 할 게 있거든요.
할 말이 있나요? 조?"
"아, 실은 교수님을 한참 찾았어요. 그런데 어디에서 묵으시는지도 모르고 전화할 방법도 없어서 무작정 어제 만났던 카페에서 기다렸어요."
"아, 하하, 맞다. 그렇군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교수님
"교수님, 아무래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전 도무지 혼자서 이 퍼즐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요. 괜찮으시다면, 교수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와 함께 같이 찾아주실 수 있나요?"
"물론, 저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어요, 조. 하지만 전 도와줄 수가 없어요."
"아.. 왜요, 교수님?"
"그 퍼즐은 제 눈엔 보이지 않거든요. 퍼즐은 퍼즐의 주인에게만 모습을 드러내지 남에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요."
".. 그런 퍼즐을 혹시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이것도 어제 얘기한 소문처럼 돌고 도는 얘기에요.
여기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씩은 들어본 알고 있는 얘기지만
아무도 본 적 없는 그런 미신이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어제
그 미신이 진짜라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지요. 사실, 저도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요. 이건 엄밀히 당신의 이야기고 당신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지만 어쨌든 옆에서 같이 본 제게도 무척 신기한 얘기였거든요. 그런데 그 퍼즐은.. 미신에 의하면 그 퍼즐의 주인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요. 즉, 진심으로 그 퍼즐이 필요한, 그 퍼즐을 찾으려는 사람만 찾을 수 있도록 어떤 장소에서 주인을 기다리다 주인이 오면 모습을 드러내 반짝이는 거죠. 다른 사람은 같은 곳에 있다 하더라도 찾을 수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퍼즐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이럴 수가, 조는 망연자실한 기분이 들었다. 가브리엘은 정말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이건 게임인 건가? 열네 시간을 날아와서 하는 퍼즐게임? 조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가브리엘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클루브린의 전역을 샅샅이 뒤져야 한다는 말이다. 마스터피스를 찾으러 온 여행에서 길바닥만 보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장난 같은 말인가.
"조, 너무 망연자실해하지 마요.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교수님, 이미 틀렸어요. 이건 그냥 장난 같은 거예요. 아빠가 그랬는지,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누가 장난치는 게 분명해요. 어쩌면, 제가
마스터피스를 쓰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걸 수도 있다고요!" 조는 가방에서 패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어제처럼 댕그랑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조, 이러면 안 돼요." 가브리엘이 패스를 주워 조에게 건넸지만 조는 받지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어른에게 예의를 차리라고 하셨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조, 들어봐요. 이렇게 포기하면 안 돼요. 여기서 포기하기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포기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 포기하지 않았어요.
전 이곳에서 마스터피스를 쓰려고 왔으니까 전 마스터피스를 쓰고
돌아갈 거예요! 이제 마감기한까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에 놀아날 수 없어요. 그리고 교수님도 그러셨잖아요. 아빠가 워드 월드인지 디즈니랜드인지 갔다는 소문만 있지, 확실한 건 아니라고.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미신은 미신일 뿐이에요. 워드 월드도 소문이고 허상일 뿐이라고요! 전 더는 이런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을 거예요." 조는 말을 끝내고 가브리엘을 지나쳐 걸어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갑자기 화가 나니까 맑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안된다. 마스터피스를 쓰려면 이러면 안 된다. 정신을 바로잡아야 해. 이제 3주 정도밖에 시간이 안 남았는걸.
"그래도 당신은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뒤에서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는 말없이 그를 돌아봤다. 마음이 약해져서가 아니라 적어도 어른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신의 마음은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나요? 워드월드에?"
가브리엘이 조에게 가까워질수록 그의 손에 든 패스가 반짝이는 게 보인다.
"그래요, 당신의 말대로 이 모든 게 다 미신이고 허상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진짜일 수도 있지 않나요? 당신은 분명 아버지가 이곳에
안 계실 수도 있지만, 혹시 이곳에 아버지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온 것 아닌가요? 아버지가 당신을 위해 남긴 비행기 티켓을 버리지 않고 당신은 비행기에 올라탔죠.
아버지를 아직도 원망하고 있는데도요. 그런데, 정작 여기까지 와서
그냥 포기할 건가요, 조 라이터?" 가브리엘은 혼란스러워하는 조에 다가가 손을 꼭 붙잡았다. 조는 그가 붙잡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봤다. 왜 그는 내가 이렇게 워드 월드에 가길 바라는 걸까? 조는 그의 맘을 알 순 없었지만, 그의 손을 잡으니 조금은 안정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전 뭘 해야 할까요, 교수님?"
"당신의 마음이 하는 말을 들어요. 그리고 그 마음을 따라가요,
양치기처럼요." 조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연금술사>라는 걸 그가 어떻게 알지? 우리가 어제 책에 대한 얘길 나눴었던가? 아님 그가 문학 교수라서 촉이 좋은 건가? 가브리엘이 손바닥에 올려둔 패스를 보고 조는 생각에 잠겼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마요. 쉽게 생각해봐요. 당신이 그를 보러 오길 만나는 마음에 아버지가 당신에 티켓을 남겼어요. 그럼, 아버지와 이곳에서 관련된 걸 찾아봐요. 아버지와 어릴 적 하던 것, 아버지를 만났다면 둘이 같이 하거나 가볼 만한 것, 아버지와 좋았던 추억이 있는 것. 당신이 상상해볼 수 있는 건 모든 건 상상하고 전부 다 뒤져봐요.
그럼 언젠가 퍼즐이 당신의 눈앞에서 반짝이지 않겠어요?
맞춰지길 바라는 퍼즐이 말이에요." 가브리엘은 어젯밤처럼 손을 흔들고 뛰어갔다.
조는 손바닥 위에 놓여있는 패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을 감아 마음의 소리를 듣기로 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될 수 있다. 시간만 버리고, 몸만 힘들고,
아빠도 못 만나고, 결국엔 마스터피스도 못 쓰고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aika 마을에 돌아갈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면, 난 아까처럼 패스를 내동댕이치고 워드 월드는 깨끗이 잊은 채 마스터피스 집필에만 정신을 쏟으면 된다. 이미 시간은 3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 이대로 패스를 버리는 것이 맞는 걸까?
조는 자신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려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아빠의 얼굴이었다.
보고 싶은 아빠, 지금 어딘가에서 나를 찾고 있을지 모르는 아빠,
내가 언젠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빠. 조는 인정하기 싫지만 아빠가 보고 싶었다.
조는 눈을 뜨고 패스를 다시 내려다봤다.
이젠 자신의 목소리가 확실해졌다. 확실하게 들렸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
어쩌면, 조 자신의 인생 처음으로 말이다.
양치기가 될 텐가? 양치기가 될 텐가?
조는 캡틴 로버트의 물음에 자신이 한 대답을 기억한다.
당연히 양치기가 되어야죠, 캡틴
조는 패스를 쥔 손을 강하게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