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四季)

'나는 아직도 새하얀 꿈을 꾸는가?' 묻고 싶었을 때

by Sehy



잊지 못해요

그저 뒷모습을 지켜볼 뿐

그저 떠나가는 등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으니

손을 놓고 있을 뿐

때로는 어떤 공허함이

등을 찌르는 듯이

아픔을 느낄 때도 있지만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라면

잘 가요,

예뻤던 어린 시절의 웃는 얼굴

아름다웠든 꾸밈없든 하얀 꿈이여

.

.

변해 가겠죠

이 길도, 나뭇잎도

나뭇잎 사이 비치는 햇빛만


받으며 살 순 없겠죠

시간의 흐름에 발을 맞추며

살아가야만 하겠죠


시간은 예쁘게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향기를 내뿜어요

나는 작은 길에 서서 홀로

머언 바다를 꿈꿔요

잘 가요,

내게 스며든 그 날, 그 사계절

몇 번이고 불러도 돌아오지 않을

.

.

잘 가요,

한때는 내 손을 잡아줬겠죠

부딪치며 괴로워했던 그 계절에


이제는,

떠나겠죠, 어딘가로 떠나겠죠

추억을 두 손 가득히 쥐고


아, 잘 가요

잡을 수 없는 새하얀 꿈이여

이제 난 바다내음이 나는 곳으로




세월의 부피가 커질수록 가는 속도에도 가속이 붙는 듯하다.

'벌써 올해도 많이 갔네' 하며 얇아진 남은 달력을 미련 남은 듯 만진다.

계절은 외투를 껴입었고 나는 무릎담요를 덮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책상엔 늘 헛헛한 맘을 달래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이 있다.


정말 엊그제까지도 '더워, 더워' 했는데 이젠 '추워, 추워' 하는 걸 보면

계절은 빨리도 돌아온다. 우리나라의 자랑인 '사계'의 이상적인 비율은

파괴된 듯싶지만 난 아직 가을의 끝자락에서 월동준비를 한다.


사실 난 겨울을 좋아한다. 11월생인 것도 있지만 겨울의 차분한 분위기가 좋고,

무엇보다 겨울 다음엔 봄이 온다는 문학적인 이유에서도 좋다.

영원히 내리는 비도 없듯, 영원히 이어지는 겨울도 없다.

그래서 내 몸도 마음도 '잘 부탁해' 하며 월동준비를 하고 겨울을 맞이한다.


그러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떠올린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설국'이란 소설의 문을 여는 첫 문장이듯, 시린 겨울을 닮았다.


겨울에 내 맘은 어느 기차 칸에서 종착지도 모르는 곳으로 달린다.

밤엔 별을 보다 창문에 기대어, 낮엔 누워 햇살을 맞으며 있을 것이다.

그러다 어둑어둑한 겨울의 긴 터널을 버텨내고 새하얀 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겨울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겨우 새하얀 꿈에 닿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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