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을 구상으로 바꾸는 AI

패션 기업이 AI를 나를 위해 쓰는 법

by 정진

본 글은 한국섬유산업연합회 주최 세미나에서 진행한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두번째 칼럼이다.


패션 업계는 지금 AI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두 가지 극단으로 갈린다. 어떤 사람은 AI를 감성을 해치는 기술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모든 것을 AI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둘 다 적절치 않은 시각 같다. 패션에서 AI가 만드는 가장 큰 변화는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감각과 판단을 더 정밀하게 만들어준다는 데 있다.


1편에서 왜 패션이 지금 AI를 이해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했다면, 이번 글에서는 AI를 어떻게 쓰느냐라는 보다 실천적인 관점으로 넘어가보겠다. 패션 기업이 AI를 활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내부 업무를 효율화하는 방식으로 나를 위해 쓰는 AI이고, 다른 하나는 고객을 더 깊이 이해하고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고객을 위한 AI다. 이 두 가지 축이 동시에 강화될 때 비로소 브랜드의 AI 전략이 완성된다고 본다.




AI를 나를 위해 쓴다는 것 — 추상적인 산업에서 구체성을 만드는 기술

얼마 전 카이스트 AI대학원 장동인 교수의 강의 'AI 에이전트가 가져올 비즈니스 변화와 기업의 대응'에 참석했다. 한 패션기업 대표의 질문에 대한 장 교수의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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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언어로 소통하는 산업이다. “엘레강스하다”, “히스토릭하다”, “미니멀하다” 같은 표현은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디자이너, MD, 브랜드 대표가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머릿속 이미지가 서로 다르다. 문제는 AI도 인간과 똑같이, 추상적 입력은 추상적 출력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트렌디한 봄 시즌 컨셉을 제안해줘”라고 물으면, AI는 그 추상성을 그대로 반영한 두루뭉술한 답변을 내놓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충분한 맥락을 주지 않으면 정확한 답변을 하기 어렵다. 결국 AI는 질문의 품질에 비례해서 더 정교해진다.


AI를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서 생긴다. AI가 일을 대신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AI에게 어떤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성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패션에서는 특히 이 점이 중요하다. 브랜드의 정체성, 시즌의 톤, 고객의 라이프스타일, 제품이 사용되는 상황 같은 요소가 모두 AI의 출력에 영향을 준다. 그러니까 질문을 소설처럼 구성해야 한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배경이 어떤지, 이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생생하게 묘사해야 AI도 같은 장면을 상상한다.


예를 들어, 30대 여성 고객이라고 할 때 AI가 이해하는 고객상은 매우 추상적이다. 하지만 성수동에서 일하는 35세 그래픽 디자이너로, 주말에는 독립서점과 전시회를 즐기며, 지속가능성 이슈에 민감하고, 지나치게 과한 브랜드보다는 절제된 디자인을 선호하는 고객이라고 하면 AI는 훨씬 더 정교한 제안을 한다. 고객을 한 사람의 인물로 상상하게 만들면 AI는 비로소 디자인, 마케팅, 콘텐츠 전략을 현실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런 방식으로 AI를 사용하면 내부 업무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기획 브리프를 구조화하는 데 도움을 받고, 시즌 테마를 세분화하며, 컬러 팔레트의 방향성을 정하고, 상품 옵션 구성을 시뮬레이션하는 데 AI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 회의록을 정리하고, 상품 리뷰를 요약하고, 재고 리스크 요소를 추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던 단순 작업이 자동화되면, 디렉터는 더 창의적인 결정에 집중할 수 있다.


결국 AI는 업무 속도를 올리는 기술이 아니라 생각의 수준을 올리는 기술이다. 추상적인 감각과 직관만으로 움직이던 패션 업무에 AI는 구체성과 재현성을 가져온다. 이것이 첫 번째 축, 즉 나를 위한 AI가 가진 의미다.


Screenshot 2025-12-05 173403.png Wall Drawing #11362004, Sol LeWitt, 출처: tate.org.uk


AI를 내부 업무에 적용한다는 건 결국 브랜드 스스로를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이해가 깊어질수록, 고객을 향한 시선도 달라진다. 내부 효율화를 위해 AI를 활용하는 것과, 고객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AI를 활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구조로 연결된다. 내부가 효율화될수록 브랜드는 고객과의 접점에서 더 감성적인 경험을 제공할 여유가 생기고, 고객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내부의 기획·생산·유통 전략이 더 정확해진다.


다음 글에서는 고객을 이해하는 방식이 AI를 통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그리고 AI가 고객의 감정과 선택을 연결하는 새로운 언어가 되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솔 르윗 (Sol LeWitt)은 "지시사항(instruction)"만 남기고 실제 작업은 다른 사람이 실행하게 한 작가다. 그의 Wall Drawing 시리즈는 명확한 프롬프트가 얼마나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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