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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Dec 12. 2022

관계를 리본으로 묶는다는 의미

상대에 대한 존중과 신뢰에 대한 예의

Please, be kind. Especially when we don’t know what’s going on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이 대사를 통해 접했다.    


"갈등이라는 것이 상대를 잘 모르고,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어떻게 될 지 모를 때, 혼란스러울 때 친절 해져야 합니다. 그 때부터 갈등이 필연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예요. 두렵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센 척 하지 맙시다." 


언젠가 데이터 과학자 송길영 바이브 컴퍼니 부사장이 한 강의에서 말한 내용이 영화대사와 접목되면서 머리속에서 이렇게 재편집 되어버렸다. 


'친절하자' 




왜 이 단어가 계속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 걸까?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보면 답이 나올 수 있겠다. 


사모펀드에서 투자를 하다 보면 수많은 이해관계자들과 만남의 연속이다. 우리 같은 GP(General Partner, 운용사), 우리가 만든 펀드에 출자하는 투자자(LP, Limited Partner), 그리고 투자대상기업 (또는 포트폴리오기업)이 있겠다.



위 그림처럼 우리는 투자자+우리 자체자금으로 펀드를 만들어서 투자를 한 후 가치를 높여 되파는(회수,EXIT) 업무를 한다. 다수 이해관계자의 결정이 한 펀드로 집결되며,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게 되면 스케줄에 굉장한 차질이 생긴다. 때로는 프로젝트가 엎어지기도 한다.  


시중에 엄청난 돈이 풀리기 시작한 2008년 금융위기 이후부터 작년 까지 약 10년의 세월은  투자자들의 Yield Hunting 시기였다. 낮아진 금리로 투자자들은 단 몇 %라도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금융상품을 찾아 나섰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금융시장 참여자들이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를 향해서 돌진하던 시기였다. 모두가 좋았다. 투자 받은 기업도 우호적 금융환경에서 본인들이 생각한 전략을 과감하게 펼칠 수 있었고, 투자자들 또한 만족할 만한 수익을 가져갈 수 있었다. 


지금은 기준금리가 10년만에 3%대를 돌파했고, 투자자들은 더 이상 Yield Hunting을 하지 않는다. 투자를 유치하지 못한 기업들의 폐업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매끈한 수트 만큼 멋진 미소를 지닌 옛 IB시절 동료들과 쓴 소주 맛을 자주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즉, '투자 → 가치제고 → 회수' 사이클이 느려지거나, 어려워지거나, 불가능해질 수 있는 시절이 되어 가고 있다.    


올 해 10월에 마케팅 하던 펀드 설정을 내년으로 연기했다. 이맘 때 즈음 클로징이 되었어야 할 펀드다.  


'좀 더 확실한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불과 몇 개월 전 대비해서 우리 자금사정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번 투자 검토를 철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년에 기회를 보시죠.' 


투자확약(조건부 확약서)을 무효화하거나, 투자 검토 미팅 후 연락두절이 되거나, 알맹이가 없는 대답을 듣거나.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은행, 보험사, 연기금, 캐피탈사 같은 투자자들의 사정이야 내가 뻔히 알았다. 그들의 조달 금리또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높아져 투자 의사결정을 하기 힘든 환경이다. 씁쓸하지만 언제든 시장상황이 좋아지면, 그 때 서로가 살아있다면 언제든 거래할 수 있는 곳들이다. 이런 경우는 전화 한통에, 문자 한 통에 무덤덤하게 관계의 리본을 묶는다. 언제든 풀 수 있게.  


하지만 투자대상기업은 다르다. 투자자들이 펀드에 투자를 해줘야 '펀드 → 투자대상기업'으로 투자가 확실해지지만, 대부분 '펀드가 설정되면 투자를 하겠다'는 조건부 확약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물론 우리만 바라보고 자금계획을 세우지는 않지만, 이런 시장 상황에서 투자 의사를 밝혀준 금융기관 하나하나가 이들에겐 소중하다. 상식적인 일이다.  


투자자(LP)의 투자검토 철회 이후 우리(GP)는 이들(투자대상기업)과 이 관계를 리본으로 묶어 두는, 꽤나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힘든 작업을 시작한다. 그냥 가위로 툭 자르듯 내 감정과 함께 관계를 잘라버릴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언제든 시작 할 수 있게 우리의 관계를 리본으로 묶어 두는 일.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그 동안 내가 쏟은 신뢰에 대한 예의기도 하다.  이 힘든시기를 지나 꼭 살아서 만나자는 약속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조금 더 친절해지고자 다짐한다. 나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도 많기 때문이다. 나도 당황스러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나는 이렇게 사방에 흝어진 관계들을 리본 모양으로 묶어가며 지내고 있다. 서로 웃을 수 있는 봄 같은 날을 기다리며. 오히려 지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희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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