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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Jan 09. 2023

친절한 2023년을 위한 키워드

2008년 금융위기에서 뽑아본 키워드 Gray, Buffer, Kind

기업금융 심사팀에서 중소기업 운영대출 심사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치자 신규대출이 중단되고, 우리 팀에게도 채권관리(연체관리)업무가 떨어졌다. 심사역 개인당 몇 개 기업의 문제채권들이 할당되었다. 내가 심사했던 기업의 대출채권이 할당되는 배려(?)를 받기도 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는 조금 더 보수적으로 금융기관 내부 건전성 분류를 한다. 보통 금융기관 자산의 건전성 분류 기준은 '정상→ 요주의 → 고정 → 회수의문 → 추정손실'로 구분한다. 통상 '고정' 이하의 대출채권(여신), 즉 고정, 회수의문, 추정손실로 분류한 대출채권을 부실채권(NPL)이라고 한다.


상식적으로 금융기관에 부실채권이 많을 수록 자산의 건전성이 악화가 된다. 그래서 금융기관 자산관리를 위해 주기적으로 고정이하 여신을 장부에서 떼어내어 외부기관으로 매각(Book-off)하기도 한다. 내시경 검사를 하면서 용종을 제거하는 과정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나는 '요주의' 채권을 몇 개 할당 받아, 이 기업의 현황을 파악하고 실제로 이자를 낼 수 있는 여력이 있는지 판단하기 시작했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더듬다 보니 한 업체가 생각났다. 강서구에서 세탁공장을 운영하던 김사장님. 규모가 꽤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키보다 큰 세탁타워가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는데 토르가 등장할 것 같은 소용돌이가 인상적이었다. 상급병원이나 5성급 호텔에서 단체복 정기세탁으로 주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2-3회 대출이자를 연체 중이었는데 곧 대출 만기였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만기 연장이 불가했고, 내가 받았던 미션은 회수 가능한 부동산 및 동산자산이 있는지 원금상환은 가능한 상태인지 정도 파악이었다.  


김사장님의 설명은 3개월 후 돌아오는 현금을 가지고 그간 연체이자와 원금상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대출연장을 안해주면 금융기관에서는 기한이익상실(대출에 있어 사망선고) 판단을 하게되고, 고정이하 여신으로 분류되어 사실상 내 손을 떠나 전문 회수조직으로 채권이 넘어가게된다. 계좌 압류에 그 빽빽한 대출계약서의 Trigger 들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던 김사장님께 우선 2년치 법인통장 거래내역과 매출처, 매입처별 세금계산서를 요청하여 면밀히 살펴 보았다. 당시 나는 2008년 위기는 금융기관에서 시작한 우리들만의 위기라는 삐뚤어진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 그렇다고 병원 임직원들이 하던 일 멈추고 빨래를 할 것도 아니잖는가. 직관적으로 이건 일괄적으로 대출연장을 중단시킨 회사의 무식한 결정의 피해자일 수 있단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부실채권으로 만들어 기나 긴 회수 절차를 밟을 것인가, 아니면 연장이란 예외에 배팅하여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볼 것인가. 




"아이 x발….." 


내 보고를 받은 팀장이 본인 머리를 쥐어뜯으며 했던 첫 한마디였다.  


"이거 현금이 일시적으로 막힌거 같아요. 제가 주단위로 관리 해볼게요. 근데 연장을 안해주면 이 사람 사업 회생이 힘들수도 있어요"  


당시 내 속에서는 일시적인 규정으로 모든 대출의 연장불가 통보가 얼마나 무식한 짓인지란 김사장님 입장에서의 생각과, 그래도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란 사측 명분의 충돌에 꽤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회사 방침을 어겨가며 이렇게 까지 해야할 일이었을까? 이 판단은 잠시 보류해보자.  


팀장은 생각보다 길지 않은 고민을 하고 결정을 했다. 


"야 정진아 그냥 연장 해보자. 이거 팀 내에서 알아서 처리하고 위에 올리지는 말자. 일단 연장 해버려"  


김사장은 약속대로 3개월 후 우리 대출을 상환했다. 팀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3개월 간 우리도 좌불안석이었다. 


이 사건을 오늘로 끌고와보니 내게 세 가지 키워드가 남았다. Gray와 Buffer, 그리고 Kind. 


Gray 영역에 대한 인식

김사장님의 비즈니스는, 그리고 당시 상태는 Gray영역에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와는 상대적으로 관련이 적어 보였고, 거래처 또한 서울 시내 상급병원과 5성급 호텔로 안정적인 편이었다. 일시적인 동맥경화라 의심이 되는데, 사망선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투자전략이든, 의사결정을 위한 Checklist를 만들 때 든 Gray영역이 존재할 수 있음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Gray영역에 대한 나의 대응에 대한 외부 판단(Reputation) 또한 Gray영역에 있기 때문에, 또 그것이 나 같이 금융시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 때 나의 행동 나의 태도가 결과의 7할 이상을 차지한다.  


Buffer는 일종의 백신

김사장님도 사업 운영에 있어 돈의 Buffer를 둬야 했고, 우리 같은 금융기관은 구체적인 정의는 힘들어도, 이런 상황이 올 수 있음을 대비해 정책 운영의 Buffer를 둬야 했다. 각자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Gray 영역에 대한 대비이다.  


Be Kind, 친절해지자


#멀티버스 A 세계의 남편

"내가 늘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야. 전략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이지. 난 그런 방법으로 살아남았어" 


#멀티버스 B세계의 남편

"제발..다정함을 보여줘 (Be kind),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양자경 주연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다. 이 대사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 지금이 2023년 1월이지만, 아마 올 해의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 2023년은 이런 뭐가 뭔지 모르겠는 Gray영역의 세계가 될 것 같다. 최소한 이런 영역에서는 우리들의 친절함과 배려가 Buffer(또는 문제해결의 Sweet spot  band)를 찾는 시작점이 될 것이고.   


(김지수)마지막으로 2023년을 위한 단 하나의 생존 키워드를 제시해 주시지요.

(송길영)“배려입니다. 배려 없는 인간은 자동 배제될 거예요. 행동하기 전부터, 말하기 전부터, 준비하고 타인의 기색을 살피세요. 구독경제, AI도 타인의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합니다. 욕망이 커진만큼 배려도 지능화 되고 있어요. 관계도 기계와 경쟁하는 거죠. 결국 섬세한 조직, 세심한 자가 살아남아요.”

송길영,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2023-01-07




*사진은 2023년 첫 출장지 울산가는 기차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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