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EU Weekl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진 Sep 24. 2023

살아있는 지식을 만드는 과정

돈이 되거나 보람을 느끼거나

지난 금요일 몇몇 동료들과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님을 모시고 술자리를 가졌다. 취해가는 와중에, 필름이 서서히 끊겨가는 와중에 머리속에서 깊게 박혀가던 느낌들을 복기해보고 싶다. 




"내가 항상 수업 시작 때 했던 말 기억나니?"


"'우리가 하는 공부는 '한양 서울학, 장소 인문학' 입니다.' 였지. 그때 내가 말하지 않은 그 다음 두 가지가 메시지가 있어. 공부를 하는 목적이기도 해. '돈이 될 수 있는 공부를 하세요. 그게 아니라면 보람이 있는 공부를 하세요.'야. 이 말을 너희에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글로 설명하기 힘든 이 뒤숭숭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3년 반 동안 내가 '왜' 서촌의, 용산의, 한남의, 북정마을의, 창신의, 숭의의, 열우물마을의 역사를 공부했는지에 대해 찾지 못한 답의 힌트를 주신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지지리 궁상맞을 수 있지만 나는 자본에서 의미를 찾고 싶었다. 5-6년 전 증권사에서 부동산개발금융을 할 때였다. 그 당시 지방 아파트까지 온 나라가 공사 중이었던 것 같다. 카니발 한대 끌고 수도권은 물론 진주, 통영 등 공사 현장까지 전국을 꽤 다녔다. 바리깡으로 밀어 놓은 듯한 평평한 땅. 현장만 보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였다. 어느 순간 찾아온 무료함을 나는 사업현장 이전에 있었던 흔적들을 찾는 취미로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내 고민을 지켜보던 동료의 소개로 한 대학원 수업을 청강 했었는데, 그날 고민 없이 바로 입학을 결정했다. 전공은 '도시공간문화'. 도시설계와 서울 중심의 역사학이 융합된 과였다. '한양 서울학, 장소 인문학'이란 주제로 서울 구석구석을 답사했고, 도시개발 케이스를 스터디 하기위해 교수님을 모시고 일본까지 다녀올 정도로 정말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부동산 개발이란 사업부지 안에 '뭔가를 남기는 것' 보다는, 지우개로 깨끗이 지운 다음 '계획한 무언가'를 그리는 쪽으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남 미사지구에 있는 상업시설 투자를 검토할 때였습니다. 깨끗하게 정리된 택지, 늘 보던 풍경이었죠. 그런데 그곳이 미사리 카페골목 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곳이었고 부모님께서도 연애시절을 추억하며 종종 이야기 해 주셨던 기억이 났습니다. 거기서 문득 사업수지표 밖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금융을 통해 건물들은 완성될 것이고, 저도 언젠가는 그 공간을 사용하는 시민이 될 것입니다. 즉, 제가 하는 일이 직간접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본에 의미'가 부여된다면, 그리고 지금은 어설프지만 먼저 이런 주제를 고민해온 분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훌륭한 교수님 지도 하에 관련 지식을 채워가는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멀리보면 사회에서 지금보다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18년 신입생 환영회 소감문>


이 때만 해도 나는 대학원 과정을,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는 나름의 힐링행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자본에서 의미를 찾는다'라는 다짐을 이용해 나 혼자 꾸고 싶은 꿈을 꿨던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 부동산 금융업을 떠나 다른 기관에서 근무한지 4년이 넘어간다. 돌이켜보면 증권사 IB 시절 좀 더 이 공부의 결과를 실무로 끌어오려는 노력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 졸업 즈음 작성한 펀드 제안서, 수업 내용을 최대한 녹여내고 싶었다


케이스 스터디로 발견한 오노미치 U2호텔


아마 교수님은 공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것 같다. 내 일에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보람을 느끼거나. 좀 더 추워지기 전에 서울을 구석구석 다시 걸어보고 싶다. 시간의 켜에 따라 내 머리속에서는 대학원 시절의 공부가 현재의 버전으로 재구성 될 것이다. 대부분 잊고 느낌만 남었을 가능성이 크겠지. 그러나 그 느낌을, 현재의 내 업業과 매듭을 지어가며 걸어보고 싶다. 새로운 지식을 살아갈 수 있는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이런게 아닐까 싶다. 이게 앞으로 새로운 분야를 대할 때 취해야 할 태도일 수도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환기(Whanki)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