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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부방 나그네 Mar 18. 2024

우리는 그저 '잘' 살고 싶을 뿐입니다.

프롤로그

"그래서, 우리가 A라는 시험을 봤을 때 정말 잘 본 사람들은 아주 잘 봤고, 못한 사람들은 아주 못한 게 양극화가 분명하죠? 그런데 B라는 시험에서는 대부분 비슷하게 성적이 나왔어요. 이러한 이산정도의 차이를 통계적으로 말하는 게 통계치가 바로 변량입니다"


9월 Y대 기초통계학 강의실. 10명 남짓 학생들이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 전날밤 친구들과 열심히 게임하느라 잠을 설친 한 남학생은 연신 하품을 하지만, 과잠 소매로 입을 가리거나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단발머리의 헐렁한 회색 후드티를 입은 여학생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점과 교수님의 설명이 다르게 느꼈는지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교과서를 여기저기를 펼쳐본다. 타타타타탁. 또 다른 여학생의 A사 노트북의 자판소리는 조용한 듯 요란하다. 교수의 말을 열심히 타이핑해서 받아 적는 듯하지만, 그녀의 노트북 화면엔 모 정부 부처에서 주관하는 대외활동에 지원하는 이력서가 열심히 수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풍경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대학생들 속에서 홀로 정장을 입고 열심히 필기 중인 그다.


회색 정장의 팔 소매 끝이 살짝 해져 있고, 흰 셔츠에는 넥타이가 매어져 있지 않다. 그가 오늘 면접을 보았거나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왼쪽 구두 뒤꿈치 부분은 다른 한쪽보다 유난히 해져있다. 구두를 벗을 때 열심히 오른쪽 발로 밟은 흔적이다. 비싼 구두를 저렇게 관리하는 걸 보면 구두 자체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인 것인지, 아니면 업무에 지친 그가 빨리 '전투화'를 벗고 싶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처 난 구두'를 보면 그의 일상이 안락하지만은 않았으리라.


그는 기초 통계 이론을 설명하는 교수를 열정을 가지고 째려본다. '나는 교수님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어요'를 어필하는 걸까. 마치 우수학생을 자처하는 어린 초등학생의 순수한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의 중인 교수도 그런 그가 신경 쓰인다. 자신의 시선을 매 학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싶지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과 너무나도 눈에 띄는 복장이 자신의 시선을 강탈함에 못마땅하다. 또 그가 수업 내용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저... 선생님, 조별 과제에서 선생님 부분은 늦어도 이번 주 수요일까지 꼭 보내주셔야 해요"


강의가 끝나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을 즐길 새도 없이 그는 학생들의 요청에 간단한 목례로 대신하고 성급히 가방을 챙겨 떠난다. '오늘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는 중간고사에 쓸 참고자료를 빌리러 중앙도서관에 들렀으나, 이내 실망한 채 돌아섰다.


'대출 중(남은 일수 23일)'


수업 때가 아니면 학교 오기도 힘든데, 또 언제 다시 도서관에 올 수 있을지 막막하다. 중간고사 기간은 다가오고 있고,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참고서를 사야 하나 고민하며 그가 일하는 직장으로 힘없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사무실로 가는 도중 그의 머릿속에 캠퍼스 라이프는 점차 사라져 온 데간데 없고, 밀린 기획안, 결과보고서와 같은 샐러리맨의 단어들로 다시 채워진다.  


그는, '샐러던트'다.


봉급생활자를 뜻하는 샐러리맨(salaryman)과 학생을 뜻하는 스튜던트(student)가 합쳐진 말로 '공부하는 직장인들'을 가리킨다. 국립국어원에서는 '계발형 직장인'이라는 어색한 말로 다듬기도 했다.


"바쁜 직장인이 뭣하러 공부를 해? 돈을 얼마나 더 벌려고?"


반 냉소적인 직장 동료들의 말에 그저 미소로만 대응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나는 왜 공부를 하는 것인가?'


누군가는 '샐러던트'를 치열한 경쟁사회가 낳은 괴물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샐러던트'를 현대사회의 직장인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상(像)'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의 다른 잣대를 가지고 그들을 평가하지만, 그들은, 아니 우리는 그저 '잘' 살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샐러던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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