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장인인가 학생인가
팀장님, 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두 손은 공손하게 포갠 채 쭈뼛거리며 말을 던졌다.
"어이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어 그래. 가야지 가야지"
말과는 다르게 팀장님은 내키지 않은 표정이다. 벌써 두 학기째 수업을 가는데도 아직 저 반응이다. '왜 하필 바쁜 지금인가? 굳이 가야 하는가?'라는 속내가 그의 시큰둥한 답변에 뚝뚝 묻어 나온다. 그렇다고 안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로서도 할 만큼 했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일을 했고, 더 이상 늦췄다간 지각 처리가 된다. 비싼 돈 내고 다니는 학교인데. 그래서 이 정도면 회사에 남들보다 더 봉사했다고 생각하지만 팀장이 그걸 알리도, 설령 안다고 해도 만족할리 없다. 더 꾸물댔다간 다른 일이 굴러들어 올까 봐 동료들한테 간단히 목례만 하고 황급히 빠져나왔다.
"사장님, ㅇㅇ대학교로 가주세요"
택시 기사님께 행선지를 말하고, 한숨을 쉬고 시트에 등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세상은 어쩐지 바쁘게 돌아가는 느낌이다. 남들의 세상도 저렇게 바쁘기에 내 세상도 이토록 바쁜 것일까. 핸드폰을 켜서 오늘 수업할 논문들을 찬찬히 훑어본다. 영어 논문이라 읽는 속도가 국문 논문에 비해 한참 더디다. '어제 봤어야 했는데' 한숨을 내쉬고 요약만이라도 급하게 읽어본다.
거센 숨을 참으며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다행히 교수님이 오기 전이었고, 어린 전업 학생들은 나를 반갑게 웃으며 맞이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서로가 더 깊은 얘기를 하기엔 같이 공유하는 기억도 없거니와 마땅히 터놓고 얘기할 대화 주제도 한계가 있다. 뭐, 대화가 통할만한 주제라 봐야 수업 내용이나 그들의 취업 상담 정도겠지. 문제는 나도 모든 직장을 경험해 본 것도 아니고, 내 직장은 그들이 관심이나 있을까 싶다.
교수님의 출석 체크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된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다. 봄날 따스한 햇살 아래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캠퍼스, 누구나 다 그곳에서의 젊고 희망찬 시절이 있지 않은가? 하찮은 추억마저도 아름다운 시절이다. 멋진 수업 이름에 '낚여서' 수강 신청을 했는데, 까탈스럽고 똥고집 교수님의 수업이라고 툴툴거렸던 그 사소한 기억, 그 사치를 나는 늦은 나이에 다시 누린다.
'위잉'
갑작스럽게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교수님 눈치를 살짝 보고 허겁지겁 무음모드로 바꿔놓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팀장님이다.
'수업 중이지? 고생이 많아. 정말 미안한데, 지난번에 내가 잠깐 말했던 기획안 있지? 그거 내일 오전 중으로는 리더십에다가 던져야 할 것 같아.'
학교 교실에서 저 멀리 떨어진 팀장이 원격으로 내 '학생 스위치'를 꺼버리고 '직장인 스위치'를 강제로 눌러버렸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고,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주변이 음소거가 되고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과 같이 슬로모션처럼 흘러갔다. 칠판은 수업내용으로 빼곡히 차 있었지만 내 머리는 그것을 기획안으로 재빠르게 바꿔놓는다.
'그래, 대충 기획안 구성은 이렇게 잡아야지. 고려사항에 들어가야 할 부분의 데이터 조사는 내일 00 씨한테 부탁해야겠다. 어휴, 이거 작업량이 상당하겠는데? 에이씨! 그냥 회사 들어가서 오늘 저녁에라도 처리해야겠다.'
텄다. 오늘도 집에 늦게 들어가겠네. 가슴 깊은 곳에서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함께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본다. '내가 저 친구들처럼 전업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교수님이 시킨 프로젝트도 정성과 시간을 들여서 고퀄리티로 척척 해내고, 미국으로 박사나 박사 후 연구원까지 장학금을 받고 가게 되는 그런 발칙한 '망상'도 해본다. 물론 정작 전업 학생들은 취업이 된 나를 보며 부러워할 수도 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으니.
갑자기 교실로 직장 일거리를 끌고 들어온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20대 초반의 새파란 감정에 심취해 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래, 교실에 있는 이 순간만큼은 난 학생이야. 내 소중한 순간을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겠어.' 다시 마음을 다잡기로 한 나는 잡념들을 버리고 내 몸속의 학생의 스위치를 열심히 찍어 눌러댔다. 칠판 위의 기획안은 다시 최신 이론들에 대한 글로 바뀌었고, 나는 마치 직장인 스위치가 켜지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 마냥 과장된 동작으로 책상 위의 논문들을 넘겨댔다.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마무리 발언을 하는 교수님 등 뒤로 1교시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참 뻘쭘한 시간이다. 학생한테 말을 걸기도 그렇고, 혼자 멍하니 있자니 쉬는 시간 10분은 지옥이다. 여기 교실에 학생들과 나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벽을 뚫고 가면 그들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물론, 내가 굳이 그런 핑계를 찾아서 대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과하게 머리를 썼더니 진이 다 빠진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교수님의 질문 세례, 학생들과의 토론 속에서 넉다운되지 않고 말이다. 교수님의 다음 시간 과제를 대충 노트에 휘갈겨 적은 후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청춘의 푸른 날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끝이 났다. 나는 다시 직장인의 스위치를 켜고 내 본업을 마무리하러 간다.
"사장님, 광화문으로 가주세요."
나는 직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