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삶
'오늘 점심엔 옆 부서 동기와 점심약속이 있고, 저녁에는 학과 조교들이랑의 모임을 가야 하네'
오늘도 빡빡한 스케줄에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말이 습관처럼 나온다.
어울리지 않는 이 스케줄은 어이없게도 내 자그마한 탁상 달력에 자주 보인다. 회사 스케줄은 빨간색, 학교 스케줄은 파란색으로 구분 짓는다. 태극기에 있는 빨강과 파랑은 조화로워 보이는데, 내 스케줄 표의 두 색은 서로가 상극인 듯하다.
"참! 한 대리님, 다음번 만날 때 기현 씨랑 같이 보는 게 어때요? 그 친구가 지금 대리님이 하고 계시는 프로젝트와 비슷한 걸 해본 적이 있거든요. 아마 도움 될 거예요. 그리고 이 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그 친구 최근에 코인으로 재미를 봤나 봐요. 엄청 전문가라던데... 만나서 코인 투자법도 물어봐요!"
"아이고,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예 이참에 날짜를 아예 정할까요? 한국인한테 밥 약속만큼 미뤄지기 좋은 약속은 없다고 합니다. 하하하!"
힘차게 웃어보지만 웃음이 영 부자연스럽다. 영업사원이 되면 더 나아지나? 어쨌든 나의 감사함을 표현할 방법이 웃음 말고는 없다는 게 안타깝다.
"좋아요! 다음 주 월요일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오케이! 체크!"
옆 부서 직원과의 점심은 또 다른 동료와의 점심약속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렇게 만난 직원들이 할 얘기는 결국 사내 가십거리, 무능력한 상사, 혹은 우리의 작은 월급을 불려줄 새로운 투자처들일 것이다.
오후 업무를 끝낸 후 나는 직장의 '전투복'을 벗지 못한 채 황급히 저녁 약속장소로 향했다. 학과 조교들의 저녁 모임은 주로 일과가 끝난 직후인 6시에 학교 인근 식당에서 이루어진다. 수업을 마친 후 곧바로 식당으로 향하는 이들과 달리, 나는 6시에 '땡'하고 총알같이 튀어가도 정시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매번 지각을 했고, 매번 양해를 구했다. 복장불량은 덤이다.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쌤!! 얼른 앉으세요.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자, 이제 다 오셨으니 시작하면 되겠네요."
다행히 웨이팅이 있었는지 다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한숨 돌린 후 좋아하는 감자뇨끼를 주문했다. 그들과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이들은 서로 연구실에서도 자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고, 자주 밥도 먹는 사이기에 나누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자연스럽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격하게 맞장구치거나 가끔 나오는 놀라운 얘기에 리액션(반응)을 잘하는 것뿐.
"요즘 친구들 채점하는데 글 너무 못쓰는 것 같아요. 또 너무 잘 쓰는 애들은 챗GPT가 의심되더라니까요?"
"어 맞아요. 나연쌤. 지난주에 내가 발견한 거잖아요! 대박 놀라운 게, 열심히 평어체로 쓰다가 갑자기 한 문장에 경어체가 떡하니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의심이 되더라니까요!"
나는 손으로 찢고 있던 식전빵을 얼른 목구멍으로 넘기고 허겁지겁 물어봤다.
"와, 그런 프로그램을 써서 과제를 해오는 사람이 있어요? 인공지능인가? 그거 되게 어려운 거 아닌가요?"
우리 사무실에서도 생성형 AI를 업무에 활용하지도 않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과제에 녹여내는 학부생들이 참 대단하다. 그런 걸 보면 학생들의 미래가 밝은 것일 수도, 혹은 우리 회사의 미래가 어두운 것일 수도 있겠다.
"아이고, 그건 프로그램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구글 로그인해서 바로 시험해 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그 문장을 조금 바꾸는 '정성'을 들였어요. 그런 케이스는 조금 낫죠. 아주 얼굴에 철판 깔고 싹 다 베끼는 애들도 있어요. 그런 애들이 점점 많아지는 게 또 문제예요!"
캠퍼스의 미래는 확실히 어두워 보인다.
"저희 학부생이던 시절과는 정말 다르다니까요. 애들이, 아주 개념이 없어!"
나는 이 대학원생 친구들도 충분히 어리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이 자신들보다 더 어린 친구들을 비판하는 모습은 꽤나 귀엽다. 덕분에 나도 같이 어려지는 느낌이고, 매 순간이 흐뭇하다. 간혹 이 친구들이 나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성친구 문제, 부모님으로부터의 취업 압박, 친구들과 있었던 트러블을 서슴없이 공유하는 것을 보면 놀랍기까지 하다. 아직 그러한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러울 뿐. 그래서인가? 난 이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단 한순간도 업무 얘기를 꺼내지 않으려 한다. 어렵게 얻은 내 '젊은 시절'을 깨부수고 싶지 않다.
나는 두 개의 삶을 살기에 내 인간관계도 두 갈래로 쪼개진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두 부류의 인연들과 만날 때 나는 서로 다른 캐릭터의 온-오프 스위치를 켰다 껐다를 반복해야 한다. 흡사 컴퓨터 게임 속 전사와 마법사의 캐릭터를 고르는 모습 같다. 한 캐릭터를 플레이하기로 결정하고 접속했으면, 다른 캐릭터는 이 세계에 들어와서는 안되며, 동시 접속은 막혀 있다. 전사 캐릭터와 마법사 캐릭터는 서로 다른 아이템과 퀘스트를 수행하고, 육성법도 완전히 다르다.
회사에서 나는 대외부서의 대리로서 업무 관계자들 앞에 선다. 우리 회사가 필요한 것을 알려주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회사에 전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업무 생태계 안에 있는 사람들로, 악수로 인사하고 서로의 일상은 제한적으로 공유한다. 학교 학생들이나 연구자들 앞에서 나는 (물론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저 대학원생 중 한 명이다. 회사의 규칙이 아닌 캠퍼스의 규칙과 법도가 적용된다. '쌤'이라는 호칭이 우리의 '코드명'이며, 서로가 악수보다는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리고 간혹 꽤 깊은 속내를 공유하기도 한다. 아울러, 우리 모두 교수님에게 '핍박'받는 어린양이다.
두 인간관계의 망은 마치 다중우주(Multiverse)와 같이 서로 다른 세계 저 편에 존재하며, 나는 그 세계들과 이어진 아주 작은 끈을 힘겹게 잡고 있다. 하나를 놓으면 몸과 마음이 편해질 테지만, 나는 그것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두 세계를 다 잡고 싶은 야심(野心) 일 수도, 두 세계가 이어져 나에게 날개를 달아줄 것이라는 실낱같은 욕심(慾心) 일 수도 있다. 그 두 세계 중 어째서인지 캠퍼스의 순수한 세계가 마치 나의 보금자리라고 느껴진다. 회사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일 수도, 혹은 그 어린 친구들의 순수함에 마음이 움직였을 수도 있다.
나는 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