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환상속의 그대

by 한약초콜릿

앞서 소설 속 인물 옷차림에 대한 얘기를 꺼내니 생각나는 게 있다. 고3 수험시절에 읽었던 외국소설이었는데 제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 내용보다 단어 하나에 눈을 빼앗겨서 제목이고 저자고 주제고 할 것 없이 금세 잊힌 것 같다.


‘그는 버튼다운 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라는 문장에서 돋을새김처럼 지면에서 강조된 단어, 버튼다운 셔츠.


처음 들어본 아니, 읽어본 단어에서 나는 어떤 매력을 느꼈다. 스마트하고 감각적이고 매사 진중하며 이해심이 넓고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마음이 따뜻하며 현학적이지 않게 지식을 자랑할 줄 아는 소박한(?) 매력이었다. 버튼다운 셔츠를 입은 소설인물의 성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나의 환상은 실재라고 여겼다. 당장에 버튼다운 셔츠의 정체를 알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나중으로 미뤘다.
고3에게 버트다운 셔츠를 입은 남자는 시기상조라고 스스로 을렀던 까닭이었다. 그러면서 환상은 더 완고하게 환상이 되어갔다. 대학을 가거나 사회에 진출해서 버튼다운 셔츠를 즐겨 입는 남자를 만날 설렘과 기대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대학생이 되었을 땐 까마득하게 잊은 환상이었다. 캠퍼스생활에 재미를 붙이기도 했거니와 정작 해놓은 것도 없이 학년이 바뀌었을 땐 학업의 무게가 신입생과는 달랐다. 정말 전공지식을 수혈 받는 분위기가 감돌았고 동기들도 알게 모르게 미래를 걱정하고 준비하는 긴장감으로 무장한듯했다. 또한 마냥 즐겁지만은 못하게 묵직한 기운을 불러온 요인은 복학생들의 출연이었다.
1년 가까이 남녀 신입생은 그저 동기였고 동갑이었다. 세대 여건이 비슷했기에 친구가 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데 격감을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똑같은 시험을 치르고 똑같은 학번을 가진 대등한 관계가 유지되다 갑자기 동기 남학생들 반이 군 입대로 학교를 떠나고 그 자리를 복학생들이 차지했던 것이다. 낯설고 불편했다.


우선 겉모습부터가 신입생이 보여주는 풋풋함이 완전히 사라져 구레나룻과 면도자국이 짙고 거칠어 보이는 그들은 어딘지 학생 같아 보이지 않았다. 세상 이치를 모두 깨칠 득도의 시간이라도 견뎌낸 듯한 어른을 흉내 내는 말투도 대화를 이어가는 데 걸림돌이 되기 일쑤였다. 친해지는 데에 한 달은 족히 걸린 것도 같다.


그중 이니셜 CH인 선배는 우리 동기 여학생들의 관심을 샀다. 흡사 모델처럼 멀쑥한 몸에 구릿빛 피부색을 가진 선배는 후드티를 자주 입었고 농구를 좋아하는지 학교 구석에 마련된 농구코트에서 어김없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보통 축구에 최대관심을 보이는 다른 선배들과는 다른 면모였고 그가 유연한 몸짓으로 볼을 튕기며 골대 근처에서 점프라도 하면 가까이서 지켜보던 여학생들에게서 감탄조의 탄식이 크고 작게 들렸다.
그런데 코트를 왕복하는 횟수에 비해 득점은 적었다. 이는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친구들은 아무도 선배가 골 득점이 적은지 몰랐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선배가 뛰니까 소리를 질렀고 응원했다.


그날은 화창한 봄날이었는데 역시나 CH선배가 이젠 너무 익숙한 후드티를 입고 목뒤에서 후드를 위아래로 덜렁거리며 맘처럼 되지 않는 득점기회를 노리는 경기를 분주하게 치르고 있었다. 마침 다음 수강까지 여유시간이 남았고 나와 몇몇 친구는 캔 커피를 들고 선배를 눈으로 훔쳤다. 당시 나는 다른 여학생들처럼 선배를 보며 행복한 상상을 하는 대신 어느 한 지점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마음으로 바라봤다. 연한 베이지색 후드티 안에 받쳐 입은 붉은 체크칼라가 유독 돋보였다.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기온 탓에 레이어드 룩은 학생들 사이에선 종교처럼 퍼진 패션 스타일 중 하나였고 선배도 예외는 아니었는데도 내 눈을 사로잡은 이유를 그 순간에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라는 이유가 전부였다. 어울리지 않아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아서도 아닌데 선배의 옷깃은 나를 희롱하듯 너풀거렸다. 그가 뛸 때마다 옷깃이 무언가를 부르듯 손짓하는 갓 같았고 이윽고 내 머릿속을 휘감는 환영 같은 게 생겨났다.


셔츠를 입은 남자. 하지만 그 남자는 셔츠를 안에 숨겨 입었는데? 그래. 저건 셔츠가 아니야. 저건,,, 흔하디흔한 체크남방이야. 음, 그렇고말고. 남방이야 남방.


애써 나는 셔츠라는 단어를 밀어내고 극구 남방이라는 말로 대체해서 선배의 옷깃을 향한 집요한 관찰을 끝내려했다. 하지만 열심히 달려선지 선배는 쉬는 시간을 틈타 트레이드마크 같던 후드티를 머리 위로 끌어올려 머리모양이 망가지든 말든 벗었다. 그리고 귀여운 눈웃음을 지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는데 여학생들은 거기서도 한숨처럼 감탄을 자아냈다.

나 역시 한숨이 나왔다.
옷깃이 멋대로 위로 뻗쳤고 옷자락이 한쪽은 바지 허릿단위로 비죽 나온 선배의 남방 때문이었다. 운동과 남방차림은 어찌됐든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고 나는 그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저 옷은 남방이니까 너무 신경 거슬려하지 말자며 내 자신을 다독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도 선배가 팔을 어깨위로 들어 올렸을 때 눈에 뛴 땀자국에서 효력을 잃었다. 운동을 마쳤으니 땀이 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왜 하필 남방을 입고 땀을 내야 했을까? 운동복이라는 옷이 괜히 있는 옷이 아닐 텐데.


그러나 그 땀이 밴 옷을 입은 모습에서도 적지 않은 여학생들은 멋있다며 수군거리는 통에 나는 내 감정을 드러내 보일 수 없었다. 아마 그랬다면 사나운 눈총으로 몰매를 맞는 것은 불 보듯 뻔했을 것이다. 그렇게 친구들이 선배에 대해 이런저런 호기심과 관심으로 재잘대는 것을 묵묵히 듣다가 드디어 혼자가 되어 집에 돌아가는 때가 되었을 때에야 나는 집단의 세뇌에서 자유로워진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리 뭇사람들의 인기가 대단하다해도 내 성에 안차면 그 대상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거다. 그리고 난 어찌됐든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괜히 꿀꿀해진 기분을 달랜답시고 좋아하는 쿠키를 사러 백화점엘 들렀다. 가야할 매장은 지하층이었는데 가고 싶은 화장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위층에 있는 화장실이었다. 단지 덜 복잡하고 그래서 조금 더 청결하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 같은 건 없었다. 가령 옷을 구경한다든가 하는.


정말 구경할 생각은 없었는데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닫기까지는 할 수 없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중에 선배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체크남방이 수두룩하게 걸려 있는 매장에서 새나온 대화는,


“버튼다운 셔츠는 20%할인해 드려요.”

“버튼, 다운이요? 그게 뭐죠?”

“아, 여기 옷깃 아래 단추가 달린 셔츠를 말해요.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좋아요.”


선배가 입었던 남방 옷깃 근처에도 작은 단추가 달려 있었고, 난 비로소 그날 버튼다운 셔츠의 실체를 알게 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