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펄롱. 나 어릴 때는 펄롱보다는 훨롱으로 불렸던 그는 영화터미네이터2로 이름이 알려진 미소년 배우다. 나이보다 훨씬 성숙하고 그윽한 눈매를 가진 펄롱은 단박에 영화팬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영원히 그 모습으로 성장하고 시대를 누빌 줄 알았다. 현재는 팬들의 기대를 저버린 얼굴이 되었지만 영화 속에서만큼은 여전히 펄롱이라 믿고 싶은 그의 모습이 담겨있다.
나도 펄롱의 이목구비에 반했지만 그보다는 헤어스타일에 더 빠졌었다. 한 올 한 올 찰랑이는 머릿결과 비대칭 길이의 커트머리는 그간 보아온 어느 누구보다 개성 있고 멋있었다. 영화를 처음 접한 당시 나는 초등 고학년이었는데 여느 여학생들처럼 머리를 길러 포니테일로 바짝 묶는 전형적인 머리모양을 고수했었다. 내 뜻이 아닌 엄마가 원해서였다. 원래 여자아이는 이런 머리모양을 하는 거라며.
나는 긴 머리가 답답했다. 감는 것은 일이며 말리는 것은 수고스럽고 빗는 일는 귀찮았으며 묶는 것은 두피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도 학교에 가면 나만 이런 고통을 감내하는 게 아니라 꾸역꾸역 버티긴 했다. 한 번씩 단발로 자르겠다고 엄마를 졸라봤지만 그건 관리하기 더 어렵다며 반대에 부딪쳤다. 어쩔 수 없이 포니테일로 매일 긴 머리칼과 씨름하던 중 펄롱의 기막힌 커트머리와 대면했던 것이다.
그때의 전기에 감전된 듯한 짜릿함과 강렬한 욕구는 내 마음을 몽땅 태워버리고 집어삼켰다. 반드시 저렇게 머리를 자르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도 나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단발도 거절당했는데 커트라니, 그것도 평범한 학생은 아무도 하지 않은 비대칭으로 양쪽머리길이를 자르겠다고 선언했다가는 등짝스매싱은 불 보듯 뻔했다. 목적을 달성할 대책이 필요했다. 그 후 며칠을 궁리하다 저녁 식탁에서 절대 엄마 아빠가 거부할 수 없는 협상을 제안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보려고요.”
“어머, 정말? 대견한 말도 할 줄 알고 이제 철드는 구나 우리 딸.” 당연히 엄마는 기뻐했다.
“갑자기 공부는 왜? 누가 잘하라고 부추겼어? 억지로 안 그래도 돼.” 그런데 아빠는 걱정스러워했다.
“아빠는 딸이 맘 잡고 공부하겠다면 응원해야지. 시작도 전부터 기운 빼뜨리시네. 우등생이 되면 아빠가 제일 좋아할 거잖아. 기억 안 나? 나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돼서 담임한테 찾아가서 내가 산수를 워낙 못해서 머리가 모자란 건 아닌지 상담도 하셨다면서. 이제 그런 창피한 딸이 되지 않겠다고 내가 각오를 다졌다는 말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에겐 비밀로 하라고 엄마한테 당부했는데,,, 설마 당신이?”
아빠의 의심이 옳았다. 엄마가 흡족하지 못한 내 성적표를 보고 어느 날 내게 실토한 비밀이었다. 아빠가 오죽 걱정됐으면 학교에까지 가서 자기 딸이 모지리가 아닐지 우려했겠느냐며.
내가 아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게 밝혀진 이상 추는 내 쪽으로 유리하게 기운 것 같았다. 내 제의를 거부하긴 힘들 거라는 얄팍한 계산이 돌아갔다.
“그런데 공부를 잘하려면 어떤 동기부여가 필요해.”
“뭐 사달라는 뜻이야?” 엄마가 눈을 흘겼다.
“아니야, 그런 거. 내가 기말고사에서 성적을 올리면 내가 원하는 거 한 가지만 들어줘. 그게 뭔지는 지금 당장 말하지 않을래.”
“물건 사달라는 거 아니면 뭐든 좋지. 그리고 굳이 당장 네가 원하는 걸 안 들어도 문제될 거는 없겠네. 성적이 오를지 그대로일지 아니면 떨어질지는 모를 일이니까.”
엄마는 흥미를 잃었는지 식탁을 치우기 시작하셨다.
아빠는 내심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눈치였는데 애써 말을 삼키느라 엄마를 도와 빈 그릇들을 싱크대로 나르셨고 나는 우선은 1차 작전을 성공시켜 부담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 후 처음으로 열심히, 분주하게, 눈을 부릅뜨고, 잠을 내쫓으며 교과서와 전과(참고서와 유사한 말)를 샅샅이 면밀하게 조사하고 외웠다. 불과 기말고사를 2주 앞둔 때였다. 드디어 시험을 치르고 성적표가 나왔다.
성적표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받아 점수를 확인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기대심리가 자랐던 모양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했는데 점수는 고작 평균 1.5점이 올랐고 그나마 이 점수도 산수과목에서 눈에 띄게 올라 평균을 상승시킨 덕이지 다른 과목들은 고만고만했다.
그러나 엄마는 항상 뒤쳐졌던 과목에서 괄목할 만한 점수를 받아오자 내 몫까지 기뻐하셨고 당장에 직장에 계신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날아가는 듯한 목소리로 날 칭찬하고 잔치라도 열자며 호들갑을 피우셨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훨씬 더 높은 점수로 부모님을 만족시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처음으로 짓눌렀다.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아빠는 정말 베이커리 케이크와 꽃다발을 퇴근길에 사오셨고 생일에나 구경하던 비싼 홀 케이크를 식탁 가장자리에 높이 올려놓으니 내가 대단한 일을 성취한 인물이라도 된 것 같았다. 겨우 1.5점이라는 성취도에 부모님은 특히, 아빠는 공부하느라 얼마나 애썼느냐며 앞으로는 무리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무려 케이크의 사분의 일을 갈라 내 앞으로 미셨다.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이 잔뜩 발린 크림케이크였고 양껏 먹이고 싶은 마음이셨던 것이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목 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나의 거짓이, 내가 숨긴 욕구가 아빠를 속여 바보로 만들어버린 울분에 자책하고 말았던 것이다. 순전히 나의 노력을 가상히 여긴 엄마 아빠를 속이려고 가장한 나의 성취는 축하받을 만한 것이 못되었다.
갑작스런 나의 울음에 아빠도 덩달아 눈시울을 붉히셨고 엄마는 이게 웬 난리냐며 내가 우는 이유를 캐려고 이성적으로 울음바다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나 내 울음소리는 속죄와 반성을 대신하는 소리로 잦아들지 못했고 기어이 아빠가 품안에 꼭 안아주시고 나서야 잠잠해질 수 있었다. 아빠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고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씻겨나가고 정리되는 기분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게 된 계기는 다른 이유로 실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