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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솔 Sep 17. 2022

자취할 때가 되었나 보다

네 것과 내 것의 경계선 긋기

추석이라 오랜만에 친척 모임에 참석했다. 코로나가 터지고 한동안 거리두기를 시행하며 확진자 수뿐만 아니라 귀찮던 모임도 줄어서 행복했다. 회사에서는 부서 모임이 사라졌고 명절이면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 마시고 서로 집안 자랑하던 모임도 사라졌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직계가족과 오붓하게 명절을 보낼 수 있어 마냥 편안하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어른들은 언택트(전화나 영상 채팅) 방식으로 꾸준히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었다.


모임 자리에 앉자마자 "너 회사 그만두고 공부한다며?", "그럼, 아르바이트해?", "중국어 번역? 그건 한 달에 얼마나 벌어?"... 난 구석에 웅크리고 딴 척하는 엄마를 상상으로 째려봤다. 내가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지내고 있다는 걸 그새 동네방네 소문냈다. 그날 모임은 나를 둘러싼 이런저런 Q&A로 채워졌다. 퇴사하고 공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요즘 연애하는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늦게 하는 것보다 이왕이면 일찍 해야 환갑 전에 손주 볼 수 있다는 둥의 내용이었다. 불편했던 2시간이다. 다음 명절은 개인 약속 안 잡히면 혼자 외출하더라도 친척모임에는 불참하기로 했다.


어르신들의 세상은 참 별난 거 같다. 대화 주제는 항상 본인 자녀 얘기나 그 자녀들의 자녀 얘기다. 세대차이일까? 난 친구 만나면 그 친구 얘기가 궁금할 뿐 그의 자녀나 그의 파트너에 대해 궁금하지 않다. 나이가 들면 변할까? 그런 거라면 나이 드는 것보다 그 사람들처럼 될 까 봐 무섭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떠들어놓고 나중에 당사자한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묻는 건 실례 아닌가? 그게 부모라도 선을 넘은 행위인 게 분명하다.


요즘 읽는 책 중에 <말의 시나리오>란 작품이 있다. 간단명료한 설명과 주변에 꼭 있을 법한 사람의 말버릇을 예시로 들면서 '말'이 지닌 힘을 알려준다. 그중 3장에서는 '경계'에 대하여 지적했다. 작가는 '경계'를 이와 같이 정의했다.


'경계 boundary'는 구분과 한계를 뜻한다. 내 것과 네 것을 분류하는 기준이 되고 내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네 권한은 어디를 넘어올 수 없는지 결정한다.


돌이켜보면 이 경계는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그동안 집에 돌아가기 싫은 이유가 이거였는지 모른다. 성인이 되고도 부모님과 동거한다고 얘기할 때면 친구나 직장 동료가 의아해하는 눈빛을 본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로하신 부모님 곁에서 돌발상황을 대비할 수 있어 안심할 수 있으니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동거한다는 말은 결국 의미 없었다. 부모님은 나 없이도 서로 잘 챙기며 생활하셨다. 집은 나한테 있어 침실과 욕실의 역할만 해주었다. 그런 곳도 언제부턴가 불편해지고 귀가 시간을 최대한 늦추게 되었다. 그 불편감은 결국 우리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무너진 이유가 아니었을까?


부모님이 나를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지만, 더 이상 꼭 필요한 동거가 아니란 걸 인지하게 되었다. 독립적인 삶의 필요성을 이제야 깨달았다. 난 성인이 되었지만, 같이 살아가는 한 여전히 미성숙한 아이처럼 보일 테고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하며 각자의 경계를 자주 침범하겠지.


예컨대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지낸다는 걸 내가 자취하며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면 우린 서로 덜 불편하지 않았을까? 난 여전히 수입이 있는 독립성을 가진 직장인이고 재택에서 근무해도 부모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난 일하느라 바쁘고 연애는 시간이 없어 만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겠다. 부모님도 자녀의 미래 걱정하지 않고 본인의 삶에 더 충실하겠지.


올해 초에 적었던 버킷리스트 중에는 '자취하기'가 있었다. 퇴사하고 고정 수입이 줄면서 지웠던 목표를 도로 되돌려야겠다. 모든 독립적인 인격체를 위해 거리두기 하리라.




참고로 <말의 시나리오>에서 알려준 5단계 경계선 만들기를 나열하며 이번 글을 마무리합니다.

1단계: 경계선을 확인하기.
2단계: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기.
3단계: 주고받기의 비율을 조절하기.
4단계: 내 욕구를 위해 할 일을 가지치기.
5단계: 죄책감은 사양하고 응원과 지지를 부탁하기.

이 방법은 '나'와 모든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에게 일률로 적용할 수 있으니 꼭 참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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