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6. 공감하기(Empathy)는 꼭 필요할까?
동양적 사고 & 서양적 사고
더블다이아몬드 프로세스는 대표적인 디자인 방법론이면서 프로세스다. 확장(Divergent Thinking)과 수렴(Convergent Thinking)을 반복하면서 디자인을 진행해 나간다. 특히, 서비스디자인 분야에서 주로 활용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프로세스를 통한 디자인이 아니면 제대로 된 서비스디자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더블다이아몬드 방식의 위상은 확고하다.
디자인 프로세스의 첫 단계
대부분의 디자인 프로세스는 보통 이해하기(Understand) 또는 공감하기(Empathy)로 출발한다. 당연하다. 프로세스라는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자들 간 이해와 공감이 우선이다. 그런데, 어쩐지 공적인 비즈니스 영역에서 이해와 공감이라니 좀 어색한 감이 있다. 일을 하기 전에 인간적으로 친해지라는 의미일까?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총 4단계에 불과한 프로세스에 이름을 가진 하나의 단계를, 그것도 가장 앞에 내세운다는 것은 그 중요성이 가볍지 않다는 의미일 거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잘 지켜지지 않아서 이를 강조하기 위함도 있으리라 본다. 항상 궁금했다. 어떻게 해야 공감할 수 있을까? 솔직히, MBTI가 T인 필자는 지금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된 집단 내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작게는 가정일 수도 있고 사회나 민족, 국가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자연스럽게 발생한 문화의 미스매칭 개념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디자인도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이 아닌가? 거기에 더블다이아몬드 프로세스도 영국에서 건너온 것이니 합리적 의심이 가능했다. 이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우선,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은 서로 다르다. 주식을 기준으로 보면 동양은 쌀 문화고, 서양은 밀 문화다. 쌀 재배를 위한 벼농사는 집단노동을 중시한다. 연중 많은 노동이 들어가므로 집단 내 유대가 강조된다. 반면, 쌀에 비해 노동 집약도가 떨어지는 밀 농사는 집단보다는 개인이 강조된다. 집단을 강조하는 동양 문화에서는 나보다는 가족, 사회, 국가가 우선이다. 우리 집, 우리 아들, 우리나라 같은 개념은 동양적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주소나 날짜를 표기할 때도 큰 개념에서 작은 개념으로 들어간다. 이름을 적을 때도 성(패밀리 네임)이 우선이고 이름이 뒤에 온다. 우리는 큰 조직 속에서 상호 관계를 중시하는 문화가 자연스럽다.
반면, 서양 문화는 반대다. 작은 개념에서 출발해서 큰 개념으로 확장해 나간다. 주소도 호수가 먼저 나오고 국가명은 가장 뒤에 나온다. 이름표기도 이름이 먼저고 성(패밀리 네임)은 뒤에 둔다. 집단보다는 개인이 우선이다. 그래서 개인주의가 동양에 비해 발달했고, 철저한 계약을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간다. 영화에 나오는 회사의 해고통지 방식은 우리 기준에서는 너무 비인간적이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문화의 차이다.
다시, 공감하기로 돌아오자. 디자인은 서양에서 들여온 개념이다. 철저히 계약 위주로 진행되는 디자인 프로세스에서는 정성적 공감의 개념이 자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할 일만 하고 끝내면 깔끔하겠지만 디자인은 클라이언트, 사용자, 다양한 이해관계자 간의 복잡하고 유기적인 관계다. 특히, 사용자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자세는 지극히 어려운 태도다. 공적인 영역을 넘어서 사용자와 공감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사고해야 한다. 더욱 나은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일부러 단계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반면, 우리에게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관계를 중요시하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업무계약을 하는 시점부터 클라이언트는 더 이상 남이 아니고, ‘우리’가 된다. 그냥 ‘디자인’이란 표현은 ‘우리 디자인’이 되고, 그냥 ‘사용자’였던 것은 ‘우리 사용자’가 된다. 돈을 받고 하는 공적인 업무지만 ‘우리 디자인’에 참여하는 우리는 모두가 하나가 된다. 사용자의 공감은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심적으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모두 동화(同化)된다. 디자인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고, 시장에서도 성공하기를 바란다. 혹시, 잘 될 수 있다면 프로젝트 계약 내용 이외의 추가 용역도 큰 무리가 없으면 서비스로 제공하기도 한다. 아주 자연스럽다. 그래서, 프로젝트 초기에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와 마주 앉아서 서로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마음을 나누는 촌극은 굳이 필요 없다. 사회적 기업의 비즈니스모델을 컨설팅할 때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공감 대화를 하는 모습도 봤다.
우리 문화에서의 공감하기는 정성적 영역보다는 정량적 영역에서 필요하다. 프로젝트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비중을 정량적 영역에 더 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것이 서툴다. 계약 시점에서 세부적인 내용을 따지면 세속적이라는 평을 들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기초적인 견적 내용이나 업무 범위 같은 중요한 부분을 대충 넘어간다. 디자인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계약 사전 조건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는 이해하기나 공감하기보다는 다른 단계가 필요하다. 프로세스 출발 전에 꼭 필요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그래서, 별도로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 바로 ‘레벨 맞추기(Leveling)’다. 레벨은 계약 레벨과 정보 레벨로 나눌 수 있다.
계약 레벨
디자인 프로젝트의 계약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표준계약서를 기준으로 한다지만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원래는 이 정도 내용과 금액이라는 참고용으로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디자인은 분명 최고의 창의적 직종이다. 클라이언트와의 계약 단계나 회사에서 기획 단계에서 이른바 대충 일한다. 견적은 표준계약서를 기준으로 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고, 업무영역이나 기준을 명확히 따진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개념 없는 행동이 된다. 복잡한 인간관계도 한몫한다. 그래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단계를 명시해야 하는 이유다.
계약 레벨을 맞추는 것은 중요하다. 디자인 프로젝트는 생계를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누군가 취미로 디자인을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디자인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 이와 함께 커리어를 쌓아가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이것을 대충 할 수 없다. 견적, 세부 항목, 일정, 투입 인력, 결과물 형식과 수준,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계약서에 꼼꼼히 넣어야 한다. 이른바, 계약 레벨의 RFP다. RFP는 프로젝트 계약에, 디자인 목표설정에 두 번 사용되는데, 프로젝트 계약 레벨의 RFP는 계약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프로젝트는 일정이 빠듯하고, 예산이 부족하다. 그 한정된 자원으로 최적의 디자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초기에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프로젝트가 안드로메다로 가는 경우를 흔히 겪었다. 진행 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와 해결 방안도 통상적인 문구가 아니라 명확한 책임소재를 밝히면서 레벨을 맞춰야 한다.
정보 레벨
디자인 프로젝트의 계약 이후 단계는 조사하기다. 조사하기는 데이터를 수집하는 단계다. 클라이언트가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모르겠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프로젝트 초기에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간에는 정보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이것이 해소되도록 정보 레벨을 맞춘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 디자이너가 두 번 일 할 필요가 없다. 앞서 말했지만, 한정된 자원 내에서 최고 효율을 따져야 한다.
디자인 프로젝트가 특허기술 기반일 경우 정보의 불균형이 크게 존재한다. 비밀유지 계약을 하면서, 클라이언트와 모든 정보를 동일한 수준(레벨)에서 공유해야 한다. 공공디자인의 경우에도 담당 공무원과 유관 공무원이 존재한다. 담당자의 소속 부서와 관련 부서가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진 경우도 있다. 모두 프로젝트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최대한 프로젝트 출발 전 공유할 수 있는 정보를 공유한 후,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조사하기를 수행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레벨 맞추기(Leveling)가 이해하기(Understand)와 공감하기(Empathy)의 대체제다. 우리는 우리에게 적합한 형태로 프로세스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공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으니 정성적인 부분에서도 클라이언트의 뜻과 의도를 같이하면서, 프로젝트 출발 준비를 잘하자는 의미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변한다. 디자인도 변하고, 프로세스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 프로세스는 디자인을 잘하기 위한 도구다. 도구는 내 손에 맞춤형이 되어야 오래도록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