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만 말하지 못하는 그것
금기(禁忌)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자연발생적이든, 혹은 필요에 의한 인위적이든 어떤 방식이든지 말이지요. 보통 암묵적으로 지켜지고 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도태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디자인의 금기는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대부분 디자인을 전업으로 하는 산업계 사람들이 대부분 공감할만한 것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디자인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공식적인 디자인 평가를 해야 하는 상황은 제외합니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주어진 상황이니까 이 때는 마음껏 합니다. 학생 때는 다른 동기나 선·후배의 디자인을, 사회에 나와서는 다른 기업이나 디자이너의 결과물을 공개적으로 평가하고 잘못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것은 디자인이나 순수예술작품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지켜지고 있는 통상적인 매너에 가까운 행위일 수도 있겠네요.
슬프게도 우리는 작금의 디자인계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는 특정 개인이나 혹은 특정 기업을 알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누군가의 동료이자 선·후배 등 다양한 관계의 인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나와도 다양한 형태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작 당사자도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수준 이하의 결과물을 공장처럼 찍어내고, 많은 일은 하지만 클라이언트의 기대에는 안 맞는.. 비즈니스 수완으로 포장되는 다양한 백 캐시나 문어발식 영업 등이 유연한 비즈니스 수완으로 포장됩니다. 보통, 개혁은 반발을 동반합니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혁과 변화가 정말 필요하다면, 좋게 좋게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향 평준화된 수준을 다시 올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이해관계자가 둘 있습니다. 예산을 확보하고 집행하는 공공기관과 수요자인 클라이언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합리적인 판단을 합니다. 디자이너가 잘하는 게 바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지요. 한 번 생각해볼까요. 공공기관이나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합리적인 행동은 주어진 예산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기관부터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예산이 5천만 원을 확보했다고 해볼까요. 단순하게 보면, 1천만 원으로 디자인 개발을 한다면 5건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될까요? 한 번 알아봤을 겁니다. 된다는 데가 있고, 택도 없다는 곳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 다음부터는 된다는 곳 하고만 협의합니다. 가능하다고 하는 전문가 혹은 전문기업의 말을 듣고 진행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공고가 나가고 나면 (다소 반발도 있겠지만) 그 예산에 디자인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납니다. 디자인의 퀄리티를 떠나서(그들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쨌든 디자인 결과물은 나옵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 많은 디자인 지원을 한 셈이 되지요. 국가예산을 적절하고 경제적으로 잘 집행했다는 내부평가가 나옵니다. 그럼, 여기에서 다시 합리적인 용기가 생겨나지요.
혹시, 조금 더 아낄 수도 있지 않을까?
자, 이때부터는 퀄리티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디자인 대가기준은 다 거품으로 보이게 됩니다. 제가 상상해 본 디자인 사업 담당자는 합리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아마 협회 등 유관기관 등에서 디자인 대가기준을 항의하는 공문은 그냥 시끄럽기 싫은 민원쯤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수요기업 입장에서 볼까요.
여기는 더 명쾌합니다. 디자인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본다면 디자인해주겠다는 기업들은 차고 넘칩니다. 어려운 시기에 디자인 일감을 만들어주는 주체가 본인들입니다. 여기에 선정된(?) 디자인 기업은 소위 시례를 받는 거지요. 별다른 영업비용 없이 일감을 받게 되는 것일 테니까요. 혹시 있을 자부담뿐만 아니라 오히려 웃돈을 조금 더 받는다고 해도 디자인 기업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기업 하는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경제적 선택입니다. 이런 노하우는 서로서로 공유된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닐 겁니다. 아무리 디자인산업계에서 제값을 받아야 한다, 제대로 된 대가기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곳과는 거래를 안 하면 됩니다. 간단하지 않나요? 크몽같은 곳은 단돈 10만 원에 제품 디자인과 구조설계까지 해준다는 사람도 있다는데..
마지막으로 디자인 기업입니다.
이곳 역시도 합리적인 판단을 합니다. 어렵게 잡은 용역이지만 주판을 튕겨보면 남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아주 당연히 이 낮은 가격에 부합하는 일을 하려고 하겠지요.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이렇게 해서 손해 보는 것을 만회하려면 답은 뻔합니다. 이런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고급인력을 투자하고 제대로 된 프로세스를 밟는다는 것은 경영자 입장에서 보면 회사를 팔아먹는 행위입니다. 갓 졸업한 인턴이나 신입사원 위주로 해서(인건비 얘기는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대강대강 그리고, 빨리 끝냅니다. 내용을 다시 검토할 여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이 딱 욕 안들을 수준으로만 정리합니다. 당연히, 수요기업에서는 이 디자인으로 생산할 만한 퀄리티나 마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추가 요구사항이 점점 늘어납니다. 마른 수건을 짜내야 그나마 살아남습니다. 짜냅니다. 살아야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난파한 사람이 바닷물을 퍼서 마시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콘셉트이고 뭐고 중요한 게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빨리빨리 일을 쳐내는 직원은 유능하고, 같은 시간 쓸데없이 디자인의 퀄리티를 고민하는 직원은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직원이 됩니다. 요령은 늘어만 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용만 살짝살짝 바꿔서 CTRL+C, CTRL+V신공을 펼쳐냅니다. 디자인 지원사업 위주로 회사가 돌아가다 보니 중장기 근속하는 직원들은 다 보고서 기술자들만 남게 되는 악순환만 생깁니다.
디자인 산업은 화려해 보이는 이면에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존재합니다. 어느 산업분야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스스로 자정 하고자 하는 노력과 발전을 위한 몸무림은 있어왔습니다. 어려운 코로나 시대를 견디면서 새롭게 도약하는 디자인 산업이 된다면, 미래에도 밝은 희망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인재가 들어오고, 국가경제 발전에 중요한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는 미래가 도래하길 기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금기를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아픔과 성숙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무 Negative 한 얘기만 한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는 Positive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