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영원한 미성숙의 존재
질투는 힘이 세다.
특히 타인을 향한 질투는 때론 지나쳐 아주 곤란한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는 질투로 인한 여러 사건이 나온다. 형인 카인이 동생인 아벨을 질투해서 살인을 저지른다. 질투의 원인은 하나님의 차별이다. 아무리 상징적 비유라고 해도 이런 케이스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 옛날에는 지금 같은 인권의식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야기 속 카인은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었다.
살인, 그것도 친동생을 살해한 것을 실수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실수라는 단어의 의미에는 '의도치 않게'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과실치상, 치사등이 이런 의미지만 사람 속을 모두 알 수는 없다. 어떤 잘못을 저지른 뒤, 바로 후회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그걸 '실수'라고 하면 안 된다. 자기변명이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모든 실수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떤 실수는 성공을 위한 거름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삶은 어쩌면 실수투성이가 기본값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실수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젊은이의 실수는 더욱 그렇다. 오히려 젊을 때 실수를 하는 것이 효율성에서는 더 나을 수 있다.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니 도전 자체를 안 하는 사회가 되지 않았는가? 젊은이의 서툰 실패에는 기성세대의 역할이 있다. 가만히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구체적인 도전의 내용을 모두 알 수 없다. 시니어의 경험은 과거에 있고 젊은이의 도전은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성공한 삶일지, 어떻게 하면 실패를 안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안다. 지금의 거대해 보이는 실패가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말을, 그 격려를 기성세대가 곁에서 해줘야 한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으라고 했지만, 이럴 때는 용기를 내자. 괜찮다, 다시 해봐라, 잘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격려하고 용기를 줘야 한다. 때론 지갑도 좀 여시라. 말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카인의 잘못은 질투에 있다.
우리 시대 젊은이의 실수는 더 이상 타인에게서 찾은 질투가 아닌, 미래를 향했으면 좋겠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사회체계는 기성세대의 잘못이자 실수다.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기성세대도 실수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위로받고 싶다.
인간은 영원한 미성숙의 존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