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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밑도 자세히 보면 어둡지 않다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지

by 송기연

나는 펜을 좋아한다.

글자 쓰는 것을 좋아해서 다양한 필기구를 써왔다. 연필, 샤프, 펜, 붓, 만년필과 캘리그래피용 딥펜까지. 그러다 무슨 바람인지 모나비 수성펜에 2년 정도 정착했었다. 우연히, 다이소 천 원짜리 만년필을 보고 다시 만년필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금까지 대중적인 만년필 여러 개를 썼고, 현재는 오래된 필통에 방치 중이다. 안다, 만년필은 가끔씩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자신이 잊힌 존재라 생각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린다는 것을. 그 몇 개의 토라진 만년필을 다시 꺼내 온수로 달래다 손이 가는 아이를 다시 만났다.


친구가 선물해 준 수제 만년필이다.

한때 만년필과 수채물감으로 어반 스케치를 그렸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관련 채널을 발견하고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과는 친했고, 현재도 디자이너라 그림에 대한 큰 부담은 없었다. 어느 정도 흉내 내는 수준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휴대용 수채화 도구도 다이소에 가면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밑그림을 그리는 만년필용 잉크였다.


수채화는 물을 많이 쓰는 그림종류다.

태생적으로 잉크는 물과 상극이다. 그런데, 어반 스케치 전문가의 밑그림은 물에 번지지 않았다. 특수한 잉크를 쓴다고 했다. 이름하여 방수잉크, 그런 게 있었다. '누들러'라는 이름의 미국잉크다. 나름 유명했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다. 즉시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제품을 받아 테스트해 보니 정말 물에 번지지 않았다. 이후 매일 1장씩 작은 스케치북에 원하는 그림을 그렸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처음 구매한 그레이 색상 외에 한 가지 색을 추가로 주문해서 누들러 방수잉크는 2개가 되었고, 두 번째 잉크를 모든 만년필에 넣었다.


오랜만에 다시 쓰게 된 만년필.

흐름이 좋지 않았다. 나의 두 번째 누들러 잉크는 매력적인 '매사추세츠 블루' 색상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써본 만년필은 당시와는 다르게 펜의 닙을 타고 흐리멍덩하게 번졌다. 첫 글자와 첫 줄을 넘어가면 처음보다 더 흐려지고 옅어졌다. 아무리 방수잉크라도 해도 만년필의 맛을 쨍함이다. 만년필을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전문가가 아니니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전문 제조사가 아닌 수제 만년필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닙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처음 보는 브랜드명이 있었다. 바꾸면 되겠다! 교체 가능한 닙이라면 어떤 것으로 교체할지, 아니면 이번 기회를 핑계 삼아 새 만년필을 살 지 고민했다.


그러다 책상 위에 있던 파커 퀑크 잉크에 눈길이 갔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해서 대부분 잉크는 파란 계열이다. 파커의 퀑크블루가 첫사랑이었다. 적당히 낮은 채도가 고급스러워 보여서 좋았다. 누들러 방수잉크 중에서도 비슷한 색을 찾다가 메사츄세츠 블루를 구매한 것이다(번지고 퍼지던 컬러가 바로 이거다). 혹시나 해서 만년필에서 메사츄세츠를 빼고 퀑크로 넣었다. 내가 만년필 전문가가 아니라 정확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누들러와 퀑크가 겹쳐서 나오던 짧은 기간을 지나자 다시 글이 쨍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내 만년필과 누들러는 궁합이 잘 안 맞았던 것일까?


전문가들은 만년필과 잘 맞는 잉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만년필 입문자에게는 같은 브랜드의 만년필과 잉크를 추천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만년필을 쓰다 보면 다양한 조합을 실험하고 싶어 지는 게 사실이다. 아무튼 나의 짧은 해프닝은 싱겁게 끝이 났다. 지금은 퀑크 블루로 열심히 글을 적고 남은 공간에는 그림 낙서도 한다. 자칫 만년필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펜을 새로 샀다면 후회했을 뻔했다. 이 만년필은 친구가 내 이름을 이니셜로 새겨서 선물한 것인데, 배은망덕의 아이콘이 되기 일보직전에 가까스로 멈췄다.




명확하게 보이는 잘못이라면 의심해봐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범위에서만 판단하는 것이 사람이다. 내가 딱 그랬다. 어찌 보면 사소한 에피소드로 끝난 일이지만, 앞으로 모든 면에서 다시 한번 주위를 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 판단은 맨 뒤로 미루고 꼼꼼하게 둘러보자.



등잔 밑도 자세히 보면 어둡지 않다.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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