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아메리카도 70년 만에 깨어났다
우리 집 냉동고는 계절과 무관하게 늘 겨울이다.
사시사철 다양한 식자재가 얼어붙은 채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중 냉동밥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다. 맨 윗 칸에서 수시로 들락거리며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하지만 그 아래쪽 형편은 좀 다르다. 한 번 들어가면 좀처럼 나올 줄을 모른다. 아, 여기서 한 마디 한다면 우리 집 식자재 관리의 책임은 와이프와 내가 공동으로 운영한다. 즉 우리 집 냉동기 빙하기의 절반은 내 선택 때문이라는 뜻이다.
냉동고는 그 집의 현실이다.
몇 개 먹다 남은 각종 냉동식품은 생생한 삶의 현실을 보여준다. 바로 엊그제 먹다 남긴 김치 냉동만두나 미니 돈가스는 이미 기억이 아닌 추억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자주 열어보지 않는 아래쪽 서랍 안의 역사는 더 유구하다. 건강한 삶을 위해 선택했던 낯선 이름의 외국 야채와 비건 콩고기는 빙하기 시대에 가 있다.
사람의 관계도 그렇다.
나에게 좋지 않은 인연을 억지로 이어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식자재를 냉동고에 던져놓는 것과 다름없다. 조만간 꺼내 먹을 식재료는 냉장고 행이다. 문제는 우리 집 냉동고 속 비건 콩고기와 같은 인연이다. 호기심이든 우연이든 어떤 인연은 나와 너무 맞지 않을 수 있다. 과감하게 폐기하는 것이 좋다. 혹시나 해서 냉장고 맨 아래칸에 넣어두는 것은 빙하기 관리비용만 늘릴 뿐이다. 전기세도 많이 나간다.
싱싱한 식자재는 냉장고 행이다.
하지만 단기간이라도 냉동보관이 필요한 식자재가 있다. 이럴 때 냉동고는 아주 효과적인 저장 공간이다. 냉동고는 잠시 쉬어가는 임시 기억저장소가 되어야지 망각 보관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냉동고 보관자리는 한계가 있어 무작정 쌓아둘 수도 없다.
좋은 식자재는 신선함이 생명이다.
잠깐의 보관을 넘어 오래도록 쟁여놓는 것은 욕심이다. 꽁꽁 얼어버린 식자재는 본래의 맛을 잃어버린 얼음돌덩이일 뿐이다. 해동을 해도 본래의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새로운 시선으로 냉동고 문을 열어보자.
그리고, 빙하기를 끝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