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디자인에 왜 철학이 필요할까?

끊임없는 파동과 에너지들의 얽힘, 디자인

by 송기연

철학(哲學, Philosophy)은 세상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판별하는 학문이다.

학문의 형식이지만 반드시 학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과 인간 삶에 대한 근본 원리, 본질 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는가에 대한 관점이면서 존재, 이성, 지식, 가치, 논리, 윤리 등 대상의 실체를 연구하는 실증적 학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인기 없고 복잡한 분야라는 부정적 인식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깊은 사고와 관점이다.


디자인 철학.

응용산업 분야에 순수학문 용어인 '철학'이 붙는 것은 디자인이 유일하다. 사전적 뜻으로 해석한다면 디자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옳고 그름의 관점일 것이다. 하지만 디자인 자체로는 그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다음 해석은 디자인을 도구로써 지혜와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인가? 이것 역시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디자인 콘셉트, 혹은 디자인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디자이너가 가진 주관이나 가치관을 의미하는 비중이 높다. 그런데, 굳이 무겁고 어려운 '철학'일까? 짐작컨대, 유일무이한 '진리'를 향한 일관되고 확고한 태도에 비유해서 철학이라는 표현을 차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개인의 주관적 가치관은 보편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의 일관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철학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그 목표는 무엇일까?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1차 목표다.

디자인의 대상이 되는 콘텐츠를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잘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콘텐츠 자체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상수다. 그러나, 고도화된 디자인 행위에는 콘텐츠 자체에 관여하거나 아예 콘텐츠의 창조에도 참여한다. 더 나아가면 '디자인 주도'라는 명목으로 모든 것의 주체로서 디자인이 기능하기도 한다.


디자인은 고정된 완성형 상태가 아니다.

어떤 디자인이든지 실은 디자인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내·외부의 (비)인간적 요인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기동하는 상태 그 자체다. 디자인의 기획부터 과정, 결과에 이르는 전 단계에서 이 얽힘은 유동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래서 시점에 따라, 관여자에 따라, 조건과 상황 등 여러 환경에서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 불완전한 얽힘의 상태에서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하나의 관점과 태도다. 불변하는 이것은 디자인이라는 작은 소우주에서 진리가 되며, 이 진리를 위해 수행하는 모든 행위와 태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탐구하고, 고민하며, 판별해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의 속성이다. 그 태도가 디자인 철학이라 명명된다. 그리고, 존재로써 드러나는 것이 주체인 디자이너의 성향과 태도, 관점이다.


사실,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중요하다.

내가 유명하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라고 해서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무시하고 진행할 수 없다. 또한 디자인은 산업계에서 정확한 포지션이 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거시적, 미시적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요인들에 휘둘린다면 디자인은 아무런 방향 없이 우주를 떠도는 먼지와 같다. 디자이너의 손 끝에서 생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내부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관측되어 나타나는 현상이고, 이는 디자이너의 손을 통해, 입을 통해 표현될 뿐이다. 디자인 과정에 완벽한 마무리는 없다. 과업의 마무리는 시간과 비용, 상황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는 선형적 흐름 중 일부일 뿐이다. 디자이너의 손을 떠난 디자인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사용자와 수용자 등 많은 이해관계자들과 만나면서 계속 변하는 불완전한 생태학적 특성을 보인다.


일관된 디자이너의 관점은 그래서 필요하다.

내부의 복잡한 얽힘은 운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파동과 에너지가 존재한다. 양자물리학의 개념에서 얼추 비슷한 설명은 본 기억이 있다. 디자인이 그런 것이다. 여러 복잡한 얽힘의 상태가 계속 변화한다. 거기에 중심을 잡고, 하나의 목표를 향하는 태도가 요구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 주체는 디자이너에게 있다. 휴머니즘 관점에서 본다면 겉으로는 결정과 진행의 주체로 보이겠지만, 실증적으로는 대변인의 역할이다. 그래서 디자이너에게는 이 복잡한 인과관계의 흐름 속에서 확고 불변의 철학적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기실 디자인철학은 대단히 형이상학적 기능의 실체다. 나의 디자인 철학은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디자이너, 꽤 멋있는 직업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펜글씨 교본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