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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글씨 교본의 추억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 명상의 또 다른 이름

by 송기연

손글씨를 쓸 일이 자꾸 줄어든다.

컴퓨터, 스마트폰 기능이 너무 좋아서 굳이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가 비효율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꼭 손으로 써야 하는 것은 본인을 확인하는 "싸인"행위 정도가 있는데... 이것도 전자서명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러다가는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패드나 태블릿에 쓰는 글씨나 그림은 제외하고 생각했으면 한다. 필기구와 리얼 종이의 마찰로 한정해야 한다. 리얼 종이라니... 써 놓고도 자꾸 어색한 느낌이다.


모두 외눈박이인 세상에서 두 눈이 있으면 그게 비정상이다.

모두 디지털 방식으로 글을 쓸 때, 손으로 글을 쓰면 그건 눈에 뜨인다.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MZ세대는 태어나보니 이미 세상은 디지털화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손글씨는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글씨체는 널려있는 디지털 폰트 중 하나를 고르면 되고, 말이나 소리를 글로 변환도 해주니 아날로그적 행위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래서, 리얼 종이에 쓰는 글씨체가 삐뚤빼뚤이다. 그렇다고 이걸 부끄러워하거나 개선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세상이 다이내믹하게 바뀌었다.


어른 글씨.

예전에는 그런 게 있었다. 20세기에 학교를 다닌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국민학교에서 처음 한글을 배운 세대의 시선에서 어른들의 글씨체는 멋들어져 보였다. 나도 지금은 아이 글씨체지만 어른이 되면 한자도 섞어가면서 멋진 어른 글씨가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어른 글씨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름의 멋은 있었다. 지속적으로 단련하고 숱하게 써온 결과물이었다. 지금은 어른 글씨와 아이 글씨를 구분하기 어렵다. 아마 글을 써온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붓글씨와 펜글씨 교본.

글씨를 잘 쓴다는 것은 공통된 목표였고 이를 위한 공통의 방법도 있었다. 이른바 잘 쓰는 글씨의 전형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개인의 개성보다 획일화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대적 상황도 한몫했다. 특히, 펜글씨는 만년필이 아닌 펜촉으로 써야 했다. 지금처럼 좋은 품질이 아닌 탓에 획을 빨리 쓸 수도, 오래도록 쓰기도 어려웠다. 덕분에 교본에 미리 인쇄된 흐릿한 모범 글씨를 천천히 따라가야 했다. 이후 나만의 글씨체를 찾았지만 학생시절에는 붓글씨와 펜글씨 교본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궁극적 목표였다.


글씨를 잘 쓰고 싶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진행형 과제다. 잘 쓴 글씨를 흉내 내고, 연구하고, 필기구도 바꿔가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군대 시절 타 소대 붓글씨 특기병이 글을 쓸 때 과정을 눈에 담았다가 볼펜으로 복기하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선임들이 쓰는 플러스펜과 만년필 글씨를 흉내 냈었다. 어릴 때 처음 연필로 쓰던 글이, 그림이 되고, 컴퓨터로 변했지만, 나는 여전히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을 즐긴다. 내 책상 앞과 서랍에는 다양한 필기구가 있다. 지금은 다이어리에 만년필로 일과와 생각을 쓰고 그린다. 물론, 스마트폰과 컴퓨터도 병행하고 있다.


생각의 속도와 글씨를 써 내려가는 속도는 다르다.

키보드로 글을 쓰면, 생각도 타자 속도에 맞춰진다. 빠르지만 거칠다. 하지만 손으로 글을 쓰면 사고의 속도가 그에 맞춰진다. 느리지만 깊어진다.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는 명상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속도가 아닌 방향에 초점이 맞춰진다. 필사는 이제 서점가에서도 엄연한 주류 출판분야다. 디지털이 팽배한 시대에 손글씨는 유니크한 장점이 된다. 작가가 원고지를 쓰는 장면은 아주 자연스럽지만, 이제는 디지털 디바이스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다. 디지털 기술이 계속 발전한다면 종이의 사각거리는 질감과 자국, 손으로 느껴지는 그 맛까지 구현할 수 있을까? 라디오가 살아남듯, 종이책이 건재하듯, 펜과 종이만 주어진다면 디자인이든, 글이든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특정한 앱이나 소프트웨어가 없어도 말이다.


빨리 이 글 끝내고, 만년필을 손에 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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