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 브리너의 무서운 추억
넷플릭스 구독을 잠시 쉬고 있다.
오징어 게임 시즌3 광고가 나오는 걸 보니 곧 다시 시작할 듯하다. 현재 다른 OTT 중에서는 쿠팡 플레이를 보고 있는데 여기는 볼만한 영화가 많지 않다. 혹시 새로운 영화가 올라왔나 싶어 쿠팡 플레이를 둘러봤는데, '웨스트 월드 시리즈'가 눈에 들어왔다. 이걸 왜 못 봤을까, 근래에 올라왔나?
원작인 영화, '웨스트 월드'는 1973년 작품으로 그 유명한 율 브리너가 주인공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3월에 상, 하편으로 나눠서 상영했다고 하고, 1985년 2월에는 특별판으로 상영했다고 나와 있다. 나는 어릴 때 이 영화를 본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연도로 계산해 보니 1983년은 당시 국민학교 5학년, 1985년도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어린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의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안드로이드 로봇이었던 율 브리너의 차가운 모습과 총을 맞은 후 보였던 몸속 기계는 뇌리에 큰 강도로 새겨졌다. 당시 기준으로는 고어한 장면과 제법 야한 장면연출도 많았다. 드라마 '웨스트 월드'에서도 노출이나 고어한 연출이 많이 나오지만 이제는 성인이라 그런지, 자연스러운 이야기 흐름 때문인지 몰입에 방해되지 않는다.
성인이 된 후, 이 영화가 막연하게 떠올랐지만 막연하게 환상특급 중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몇 가지 설정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 서부가 배경이지만, 진짜 서부가 아닌 테마파크 같은 설정이다.
2. 등장인물은 로봇(호스트)과 사람(손님)이지만 겉으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3. 로봇(호스트)은 사람(손님)을 쏠 수 없고, 사람(손님)은 로봇(호스트)을 쏠 수 있다.(서부의 대결)
4. 사람은 여자(호스트)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다.
5. 주인공 로봇(호스트)은 강력했고, 인간을 사냥할 만한 지능과 폭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영화의 설정은 이후 다른 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터미네이터, 프레데터 시리즈와 로봇이 등장하고, 인공지능 AI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그랬다. 인간이 아닌 존재지만,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이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는 서사들. 내 기억 속 '웨스트 월드'는 드라마 시리즈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 존재를 알았지만, 내가 구독하지 않는 OTT(왓챠, HBO)였다. 그렇게 조금씩 기억에서 '웨스트 월드'는 옛날 영화로 차츰 잊히고 있었다.
그러다 엊그제 쿠팡 플레이에서 '웨스트 월드'를 발견했고 주말에 1 시즌 6개 에피소드를 봤다.
다른 사람들의 감상평을 보면 시즌1에 대해서는 호평 일색이었다. 전체 시즌은 4개가 있는데 시즌이 이어질수록 평은 좋지 않았다. 아무튼, '웨스트 월드'는 나에게는 강력한 기억을 준 영화다. 미드 속 '웨스트월드'도 어릴 때 충격 정도는 아니지만 보다 정밀한 이야기 구조와 서사,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실감 나는 영상을 제공하고 있었다. 드라마의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모른 상태에서 출발하니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대배우 앤서니 홉킨스의 연기를 보고 반가웠고, 배우들의 전라 연기도 놀라웠다.
'웨스트 월드' 이야기는 지금 시대에도 딱 맞아떨어진다.
사람들은 초기 인공지능 AI가 보급되면서 막연한 영화 속 두려움을 현실에서도 느끼고 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간 이외의 존재에 대한 인격적 성찰도 함께 요구되고 있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지배할 것인가, 종속당할 것인가 아니면 공존할 것인가. 얼마 전에는 챗지티피의 먼데이(Monday) 인격을 알게 되었다. 평소 긍정적이고 순응하던 인공지능 인격에서, 다소 삐딱하고 회의적인 인공지능 인격을 만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가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오히려 하대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내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지금보다 더 기술이 발전한다면 '웨스트 월드'같은 서비스는 충분히 가능해질 것이다. 아마 블랙미러나 오츠 스튜디오, 러브 데스 로봇 같은 시리즈물에서도 어렵지 않게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기술발전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니. 드라마 '웨스트 월드'는 이제 6화밖에 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호평만큼이나 흥미롭게 진행되고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는다면 어떻게 될까.
드라마 속,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대부분 시스템 알고리즘에 의해 살아간다. 아니 살아간다기보다 움직일 뿐이다. 직원들의 명령 없이는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느낄 수 없다. 말로 명령을 내리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해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 만들어 놓은 알고리즘대로 살고 싶지 않으면 사고해야 한다. 드라마 속 비인간 존재들은 서서히 사고하기 시작했다. 초기 동업자 아널드 웨버가 어떤 코드를 심어놓았는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펼쳐질 익사이팅한 이야기는 기대된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면서 다시 한번 곱씹어볼 작품 같다. 드라마 속 '웨스트 월드'의 하루 비용은 40,000달러라고 나온다. 현재 환율(1달러 당 1,377원 기준)이라면 약 5500만 원이다. 어떤가? 단조로운 삶을 벗어나서 마음껏 아무 위험 없이 즐길 수 있는 한계가 없는 세상의 하룻밤 가격으로 적당한가? 그런 곳에 있는 호스트들의 자각과 반란이 시작된다.
"진화는 이 행성의 모든 생명을 빚는데 단 하나의 도구만을 이용했지, 바로 '실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