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
92-13021847.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군번이다. 93-9625. 이건 내가 아주 꼬맹이 시절 최초의 우리 집 전화번호다. 이런 게 왜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을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사람의 기억력은 참 신기하다. 기억의 정보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상황들이 함께 조금씩 남아 있다. 문득 스마트폰을 보니 저장된 연락처가 거의 1,000여 개에 육박한다. 이 모든 연락처 중에는 중복도 있고, 중요한 사람도 있으며 다시 연락할 일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내가 외우는 번호를 생각해 보니 한 자리 숫자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편리한 번호 저장 기능이 내 기억력을 떨어뜨린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편리함에 익숙해진 것일까.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는 약속의 무게가 참 가볍다.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돌발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정보는 실시간 함께 공유된다. 마음만 먹면 실시간 위치정보까지 알 수 있다. 정말 편리하다. 가끔 인터넷에 80~90년대 사진이 올라온다. 당시에는 약속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유는 당연히 약속 때문이었다. 약속 시간에 먼저 온 사람은 그냥 기다리거나 신문, 잡지 등을 볼 뿐이었다. 지금처럼 상대의 위치를 물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약속을 펑크 낸다면 그건 상당한 결례이거나 심각한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이트 상대를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예전 드라마 속 장면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금 MZ세대는 동의 못하겠지만.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의 삶은 편해진다.
전기는 어둠을 밝혔고, 컴퓨터는 수작업의 비효율성을 타파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세계를 하나로 연결했으며, 이제는 인공지능 AI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야말로 번갯불 같은 속도다. 이제까지의 삶은 비효율의 극치로 여겨진다. 모든 것이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하는 만큼 인간의 삶은 단순해지고 편리해졌다. 이제 더 이상 친구의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아도 된다. 마음에 드는 이성은 인스타 계정이 우선이다. 나의 매일매일 일정은 포털사이트와 인공지능이 관리해 준다. 거기에 매 순간마다 나의 생체리듬이나 소식, 정보를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그것도 내가 딱 좋아하는 것만 쏙쏙 골라서 말이다. 이제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설계를 하는 전통적인 인간능력의 영역에서 인공지능의 힘을 빌리지 않는 사람은 시대에 뒤처지는 취급을 받는다. 아니 스스로도 퇴물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일의 효율뿐만 아니다. 인공지능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극단적인 효율은 인간이 생각하는 행위 자체도 멈추게 한다. 간단한 계산이나 발상도 인공지능에게 의존한다. 물론, 아주 편하다. 내가 하는 생각과 판단은 어쩐지 오류의 위험이 걱정된다. 이와는 달리 인공지능 AI는 완벽을 넘어 미처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추가 정보와 현명한 판단까지도 해준다. 이제 중요도가 높은 생각이나 판단이 필요한 결정은 AI의 몫이 될 것이다. 여기에 자율주행은 인간의 몸도 편리하게 만들어 준다. 운전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불편하지 않은 시대가 머지않았다. 우리는 어디까지 편해질까.
한 번 익숙해진 편리함을 뿌리치기는 어렵다.
우리 뇌는 아주 효율적인 장치여서 비효율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 번 경험한 편리함과 효율은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는다. 디자이너들도 그렇다. 미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나 발상, 스케치 등을 인공지능은 아주 그럴듯하게 정리해 주고 그려 준다. 이제는 손가락이 퉁퉁 불어가면서 어렵게 드로잉 스킬을 연습할 필요도 없다. 몇 가지 AI 툴을 잘 다루기만 하면 짧은 시간에 그럴듯한 디자인 결과물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 편리하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컴퓨터, 인터넷, AI가 없어도 디자인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한 때 컴퓨터에만 국한된 질문이었다. 학부생들에게 질문하면 곤란한 표정을 짓곤 한다. 아날로그 사람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디자이너라면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디자인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컴퓨터, 인터넷, AI가 있으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에는 동감한다. 전통적으로 생각과 사고, 조사와 분석, 표현과 의사전달은 사람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 고유의 영역도 어느덧 AI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정보처리 능력과 냉철한 분석을 통해 멋지게 처리해 낸다. 이제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해 내는 능력보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공지능 툴을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새로운 AI에 대한 정보와 숙련정도가 중요하게 되었다. 이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디자인계는 거의 완벽하게 인공지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저마다 인공지능 기능을 탑재하는 쪽으로 진화 중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힘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평생 디자인을 해온 원로 디자이너보다 학부 1학년의 디자인 결과물이 그럴 듯 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생산이나 양산을 위한 세부 프로세스, 다양한 이해관계에 대한 경험치는 정복되지 않았지만 그것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이 편리한 기술인 AI를 어디까지 활용해야 할까? 술을 마시면 기분이 알딸딸하고 좋지만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마시면 몸과 정신이 병드는 것처럼 나름의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AI는 계속 발전할 것이다.
지금도 챗지피티가 없으면 업무 자체를 못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런 말을 하는 본인들도 알고 있다. 무서운 것은 알지만 AI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서 이전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사람의 비율 역시도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 스카이넷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 오기 전에 인간이 먼저 백기를 들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AI에 대한 의존도를 조금씩 조절해 보면 어떨까? 최소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들고, 음악을 만드는 기술적 영역은 몰라도, 기본적인 생각과 사고를 하는 일 정도는 인간의 힘으로 해보자. 지금 당장은 승부가 안 되겠지만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계속 마실 수 없다.
그게 최소한의 인간 존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