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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디자인 철학(최종)

기능과 아름다움, 두 마리의 토끼

by 송기연

일반적 관점의 디자인 철학


철학(哲學, Philosophy)은 세상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고 판별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학문의 형식과 함께 세상과 인간 삶에 대한 통찰의 내용도 함의하는 실증 분야이기도 하다. 진리, 존재, 이성, 가치, 논리, 윤리 등 얼핏 생각하면 복잡하고 재미없는 탁상공론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삶에 대한 중요한 관점과 태도이기도 하다. 산업 분야의 전문 직종에 ‘철학’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은 디자인이 유일하다. 철학의 사전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디자인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 자체로는 그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옳고 그름은 단순한 개인적 선악 기준이 아니다. 지고지순하고 변함없는 진리를 추구하는 관점을 말한다. 다음으로는 디자인을 옳고 그름, 즉 진실을 판명하기 위한 도구로써 보는 해석이다. 이것 역시 확실히 와닿지 않는다. 보통의 해석으로는 디자인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디자이너가 가진 확고한 주관이나 가치관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굳이 무겁고 어려운 ‘철학’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짐작컨대 유일무이한 ‘진리’를 향한 일관되고 확고한 태도가 디자인에도 있어야 한다는 ‘당위(當爲)’의 의도였을까?

디자이너의 개인적 주관은 보편적 개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디자인이라는 전체의 속성이 하나의 일관된 목표를 행해 함께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철학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그 목표는 단순히 굿디자인(Good Design)으로만 통칭할 수 있을까?





기능주의와 디자인

디자인의 가치(Value)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많은 관점이 달라진다.

전통적인 철학의 이원론과는 다르게 디자인은 ‘기능주의’와 ‘심미주의’로 지향점을 나눌 수 있다. 현대 디자인은 영역에 상관없이 모두 ‘문제 해결’을 지상과제로 둔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꼭 디자인만의 역할은 아닐 것이다. 과학, 종교, 윤리, 그리고 모든 산업분야 아니 거의 대부분 인간 삶의 많은 지향점은 문제해결이다. 저마다 다른 문제가 있겠지만 디자인도 별다른 개성 없이 문제해결이라는 레드오션에 뛰어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디자인은 적어도 특정한 변별력 있는 목표를 가져야 한다.


기능주의는 한때 전 세계를 뒤덮은 디자인의 지상과제였다.

부족한 물자와 환경, 특히 세계대전을 거친 후 황폐화된 유럽 서구사회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이 모든 산업의 목표였다. 여기에 디자인도 빠질 수 없었다. 독일의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기능주의는 ‘Simple design is Good Design’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 단순히 형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재료와 생산 및 가공방법 등 모든 것에서 미니멀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이런 디자인계의 인식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빠른 산업화 과정을 경험한 우리나라에서는 장식성이 가미되거나 생산에 비효율적인 디자인 요소는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규탄의 대상이었다. 물론 오늘날 세계는 지나친 과잉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적 가책에서 디자인 역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다. 급격한 산업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환경과 미래보다는 철저한 기업윤리에 동참하면서 산업중심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애쓰던 시대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디자인의 가장 큰 목표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디자인의 대상이 되는 콘텐츠를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잘 표현하고, 이것이 시장에서 상업적 성공도 가져올 수 있으면 그보다 더한 디자인의 미덕은 없었다. 사실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중요하다. 아무리 유명한 디자이너라고 해도 내 마음대로 디자인을 할 수 없다. 디자인을 둘러싼 거시적이고 미시적 환경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외부 요인에만 휘둘린다면 디자인은 마치 정처 없이 떠도는 우주의 먼저와 같다.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 짧은 기간 동안 목표한 성과를 이룬다는 것은 확률이 희박하다. 그렇지만 디자인은 그런 낮을 확률을 조금씩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기능주의 디자인에 대한 나의 생각은 확고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단단했던 믿음에 조금씩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심미주의와 디자인

아름다움은 디자인에서는 금기어다.

디자인 겉만 예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강박처럼 느껴진다. 애써 ‘아름다움’이라는 복합적인 개념을 ‘예쁘다’는 단순하고 저급한 뉘앙스의 말로 애써 격하시켰다(예쁘다는 말도 절대 그런 취급을 받을 말이 아니다). 아름답다는 의미는 대단히 높은 가치를 가진다. 겉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은 내면(콘텐츠)과 최적의 상태를 함께 나눈다는 의미다. 이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조화, 균형, 율동, 비례, 점진, 강조 등 조형언어가 필요하다. 메이크업을 화려하게 하고 멋진 옷을 입었지만 인간성, 말투, 태도가 엉망인 사람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내면(콘텐츠)과 외면(디자인)이 하나처럼 표현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디자이너라는 직업인이 ‘아름다움’을 외면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중요한 일은 누구의 몫인가? 혹시 조형표현능력이 부족한 디자이너나 비전공자들이 만들어낸 레토릭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철학자 칸트는 참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봤다. 여기에서 참과 거짓은 ‘과학’이, 선과 악은 ‘종교’, 아름다움(善)과 추함(醜)는 ‘예술’로 발전했다. 나는 여기에서 예술의 역할이 현대에서는 디자인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예술은 모든 사람이 대상이 아니었지만 디자인은 모든 사람이 소비자이면서 사용자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예전부터 궁금했던 점이 있었다. 왜 우리가 배우고 익힌 디자인에 비해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의 결과물을 다를까 하는 점이었다. 필립 스탁, 카림 라시드, 알렉산드로 멘디니, 하이메 아욘, 자하 하디드 같은 유명인들의 결과물은 디자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마치 순수 예술 쪽에 가깝게 느껴졌다. 왜 우리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빠르고, 싸게 만드는 문제해결에 집착하는데 그들은 우리와는 다를까. 거기에 그들의 결과는 우리보다 훨씬 대우받고 유명해질까. 또한 크몽 같은 재능플랫폼에서 로고디자인 하나에 5만 원, 제품디자인 10만 원 인 시장도 현시대에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관심 있게 찾아본 결론은 그들과 우리의 문화적 차이였다. 기능주의가 우선이다, 심미주의가 우선이다라는 개념이 아니다. 저마다 추구해 온 문화와 사회에 따라 흘러온 것이다. 서양이 좋아 보이던 관점도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수준도 글로벌 기준이다. K-pop은 물론, 다양한 K-콘텐츠가 세계 표준이 되었다. 넷플릭스의 케이데몬헌터스 같은 콘텐츠는 이제 예측이 불가능할 수준으로 확대 생산이 될 예정이다.



나의 디자인 철학

기능주의 관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디자인은 현실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클라이언트의 요구, 최적의 디자인은 늘 그래왔듯이 중요하고, 현대에는 또 다른 이유로 지속가능성을 디자인에 접목해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은 발전하고 트렌드는 변한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은 이제 에이전트 AI시대를 지나 초지능 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가 눈앞이다. 여기에 디자인을 위한 다양한 도구들이 개발되면서 디자인 능력에 대한 기준도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숙련된 경험 많은 디자이너가 설 자리는 어디일까? 기능만능주의 시대일수록 기능 못지않은 통찰과 라포(Rapport)가 중요하다. 기능주의 디자인에 대한 내 철학은 거꾸로 간다. 예전부터 새로운 기능은 주니어의 몫이고, 기획과 상황파악은 경험 많은 시니어의 역할이었다. 기술과 기능이 못하는 아날로그 디자이너의 역할은 인간이 수행하는 것이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는 디자인의 인간 역할이라 본다.


심미주의는 이제 제대로 필요한 때가 되었다.

이제 우리가 추구하는 기능주의 디자인은 한계에 봉착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이제 풍부하다 못해 넘치고 있다. 변별력 없는 문제해결은 기능과 자동화 알고리즘에 많은 부분을 맡기고 아름다움을 추구하자. 이제 우리는 밥을 한 끼 먹어도 맛있는 메뉴를, 멋진 분위기와 조명이 있는 풍경 좋은 식당에서 좋은 사람과 먹을 자격이 있다. 얼마 전까지 내가 종교처럼 가졌던 신념인 ‘디자인은 키다리 아저씨’ 라거나 ‘디자인이라는 형식이 내용을 앞서면 안 된다’라는 생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디자이너마다 개성이 드러나고, 아름다운 것을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디자인은 늘 미완성이다.

양자물리학의 복합한 파동과 에너지의 얽힘처럼, 디자인도 복잡한 여러 사상이 혼재되어 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듯 누군가 기준을 애써 마련하지 않으면 복잡성은 증가할 것이다. 여기에 중심을 잡고 개성 있는 관점을 추구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은 디자인 산업계에서 경험 낳은 제품디자인기술사의 몫이라고 본다. 우리가 저마다 삶의 궤적을 바탕으로 한 번쯤은 디자인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철학을 정리하는 것은 미래세대를 위한 의무이기도 하다. 디자인은 늘 시대를 거치면서 그 형식과 모양을 바꾸며 생존해 왔다. 지금은 혼란의 시대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이 복잡한 세상의 인과관계 속에서 명확한 철학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실 디자인 철학은 대단히 형이상학적이면서 우리 삶의 중심에서 기능해 왔다.


디자인은 기능주의의 전제에서 심미주의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

기능과 아름다움이 서로 통섭하는 사이가 될 때 그 결과물이 사람에게 주는 경험의 질은 달라질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지 말라는 것은 속담 속에서나 통용된다. 디자인은 유능하기에 기능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제대로 하기 힘든 것이 디자인 아니겠는가.


디자이너, 생각해 보면 꽤나 멋있는 직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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