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네

by 송기연

더위가 마지막 기승이다.

이제는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의 날씨가 되니, 한여름의 열대야는 이제 끝나지 않았나 싶다. 마침 엊그제 안방에 있는 에어컨에 온도센서 에러코드가 떴다. 원래 몸에 열이 많은지라 아직까지는 에어컨 없는 밤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잠시 고민했다가 AS신청을 해서 화요일에 고쳤지만, 막상 정상 가동이 되니 밤 기온이 뚝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에러코드가 자주 깜빡이는 것을 그대로 두기도 어려웠다.


나는 원래 밤잠이 없는 편이다.

밤에 작업을 한다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면 야심한 시각까지 안 자고 버틸 수 있다. 여름밤이 겨울보다는 짧다고 하지만 무더운 여름밤은 체감 상 겨울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


아무튼 밤은 그만의 매력이 있다.

집이든 직장이든 어디든 자정이 넘어가면 밤 고유의 먹먹함이 있다. 가전제품에서 나오는 화이트 노이즈도 없어지고 나면 멀리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도 더욱 크게 들린다. 인공의 느낌이 전혀 없는 밤의 고요한 공기가 주위에 내려앉으면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는다. 누구는 명상이든 조용한 시간을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갖지만 나 같은 경우는 밤이 더 좋은 것 같다.


밤은 공상의 시간이다.

자정을 넘어 1시 정도가 되면 시간이 더디게 가는 느낌이다. 생각이나 고민거리가 있다면 그 생각은 더욱 또렷해지는 기분이다. 그런다고 그 시간에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왠지 그 시간은 고민의 최적화된 시간 같다. 복잡했던 하루의 일과와 머릿속 걱정이 한꺼번에 달려온다. 그렇다고 그런 게 다 괴로움이나 불편함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밤이 주는 시간이 마치 생각의자 같다.


늦은 밤, 자지 않는 많은 사람이 있다.

집에서도 맞은편 동을 쳐다보면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집이 꼭 있다. 저 집 사람은 왜 저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을까, 아니면 못 자는 걸까. 쓸데없는 오지랖이 도진다. 그러다 언제는 그 집의 불이 빨리 꺼지는 날이 있다. 누군지 모르는 아무개의 걱정과 번뇌가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는지 알 수 없다.

오늘도 기온은 선선하다.

9만 원에 가깝게 주고 고친 안방의 에어컨은 내년을 기약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모처럼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덕분에 아침에 아주 찌뿌둥한 컨디션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아침 운동 프로그램이 유산소의 끝판왕이어서 힘든 오전을 보냈다. 오늘은 제법 일이 몰린 데다 중간중간에 예상치 않았던 일도 생겼었다.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적는 지금에야 숨을 조금 돌려본다.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날은 뭔가 뿌듯한 자부심이 생긴다. 하루를 낭비 없이 잘 활용한 느낌이어서 좋다.


오늘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온다.

낮 시간을 잘 보냈으니, 밤은 조금 게을러져도 되지 않을까? 내일도 나를 기다리는 몇 가지 일이 있지만 오늘에 비하면 훨씬 가벼울 것이다. 그래서 어스름이 내려앉은 지금의 분위기가 좋다.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서 업무를 하고 나니 해가 지는지도 몰랐다. 이제 하루의 후반이 시작됐다. 우주의 자연스러운 원래 모습이라는 어둠 아닌가. 우리는 전기라는 든든한 자원이 있으니 안심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5~6시간 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기분 좋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밤이 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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