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현 Dec 20. 2023

나의 퇴사 이유는

어린이집을 퇴사할 때

원감은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지난 이야기(감봉과 도적질)를 읽은 독자분 중엔 궁금할 수도 있겠다.

원장이 조용히 알아듣게 얘기한 이후 원감은

정확히 1도 변하지 않았다. 내 예상이 맞았다.



며칠전 주방 냉장고 공간이 부족해서 교사용 냉장고에 빼둔 아이들 팩우유가  없어다. 미리 확인까지 해서 발주하지 않았는데.

원감은 이젠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자신은 본 적이 없고 누가 가져갔냐고 하면서 한 마디 진심을 내비쳤다.

"조리사님, 다음부터 그런 건 손대지 마시오라고 써 붙이시지요."

그럼 나머지만 가져가겠다고 소리 아닌가?

그런데 조금 있다가 원장에게 우유얘기를 하자

원장도 똑같은 얘기를 해서 날 또 한 번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제야 그 '의중'을 알았다.


차리리 조리사님은 그러든 말든 개의치 마시라 한 던가...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원장은 이제껏 일함에 있어 늘 원칙을 강조하며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온 터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녀들의 꼴값을 더는 보기 싫어서.




어린이집은 보통 계약기간이 종료하는 2월에 맞춰  

(그 중간이면 말할 것도 없이) 그이전에 이직이나 퇴사이유를 잘 준비해야 한다. 속내야 어떻든 얼굴 붉히며 나가면 을중의 을이 되기 십상이다.

그건 조리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불만이 있더라도 참고 있다가

디스크수술을 한다는 둥, 몸이 안 좋아 몇 달 쉰다는 둥,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둥,

뻔히 아는 거짓말을 해주는 게 이 업계의 에티켓이다.



"원장님, 잠깐 드릴 말씀이..."

퇴근하면서 원장과 눈이 맞주치자 말을 꺼냈다.

"말씀하세요. 조리사님."

"제가... 올학기까지만 일하고 싶어서요."

원장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그런 기색을 감추고는  이유를 먼저 물었다.

"왜요? 왜요?"

나는 깃털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새로운 곳에서 일하고 싶어서요."

"왜요?"

"3년이면 오래 했잖아요."

"다른 어린이집에 가시게요?"

"아직 알아본 건 아니고요. 올학기가 내년 2월까지니까 미리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

똑같은 말로 세 번이나 묻는 걸 보니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마도 조리사가 그만둔다는 사실보다 그 이유 때문일 다.

학부모들부터 원에 오는 사람들마다 자랑해 온 3년 넘은 조리사가 그만둔다는데 그 이유가 새로운 곳에서 일하고 싶어서라니....

원장입장에선 처음 듣는 퇴사이유일 것이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

이게 나의 퇴사 셉이다.

나름 치밀하게 공들인 멘트이기도 하다.


이유 같지 않은 나의 퇴사 이유를 소화시키고 한동안 다른 이들에게 말하려면 꽤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때론 거짓말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 거짓말을 대신해 줄 만큼 그들에게 친절함이 남아있지 않다.


원장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신가요, 이미 마음을 정하셨나요?"

"정했어요."

나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복지는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