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우유! 몇 달러나 한다고!
잭클린.
줄여서 잭키.
쉐어하우스 주인이었던 재미교포.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하우스 메이트.
내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행동을 일삼곤 했던.
잭클린의 특기는 남 탓이었다.
숏컷의 나보다 최소 오십 센티는 긴 머리칼을 가졌으면서, 욕조 구멍이 막히는 이유를 전적으로 내 탓으로 돌렸던 일화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녀가 평소 얼마나 남 탓을 일삼는지를.
'이 몹쓸 세상!'
그 말이 잭클린 입에서 나오는 날엔 특히나 이야기가 길어지곤 했다.
다른 하우스 메이트들은 슬그머니 방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나만 그게 잘 안되었다.
부엌에 서서 그 몹쓸놈의 세상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들어주느라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으니.
언제더라?
듣다 못한 내가 그렇게 미국이 싫으시면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게냐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몹쓸 세상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
기억에는 그때 잭클린이 나를 향해 웃었던 것 같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 싫다고 했더니, 한국에 사는 미국인이 되라고?"
라면서.
요약하자면, 살 곳이 못된다는 얘기였다. 미국도 또 한국도.
그럼에도 일 년 가까이를 그 집에 살았다.
잭클린의 보살핌? 을 받아가며.
어디서 대박 세일을 하니, 필요하면 거기 가서 사라는 둥. 각종 쿠폰에 바우쳐, 박씨 물어다 주는 제비가 따로 없었다. 회사에서 파티가 있는 날이면 보따리 보따리 핑거푸드를 챙겨 와 하우스메이트들에게 인심을 펑펑...
돌이켜보면 전기세며 물세며 다른 하우스 메이트들보다 잭클린이 몇 달러씩은 더 냈던 것 같다.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로.
다 같이 모여 와인을 마시던 날이던가? 누군가 잭클린에게 물었다.
혼자 살아도 될 걸, 왜 굳이 쉐어하우스를 운영하는지를.
대답이 내 예상과는 달라 의외였다. 혼자 살아본 적이 없어서라나.
잭클린 말에 따르면, 퀸즈의 그 구식 아파트는 여자 혼자 살만 한 집이 아니었다.
참새와 키재기 가능한 크기의 바퀴벌레하며, 층간 소음에 대한 항의표시로 아래층 사람이 천장을 찔러대기 일쑤였던. 게다가 갱단이니, 총기사고니, 잊을만하면 지역신문에 실리는 동네였다.
/ / /
잭클린네 하우스룰은 유독 우유에 엄격했다.
"냉장고 칸은 나눠 쓰는 게 기본인 거 알지? 특히 내 우유는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그녀가 읊었던 규칙 중에 제일 첫 번째였으니까.
실제로 그랬다. 잭클린이 쓰는 칸에는 늘 같은 우유가, 똑같은 브랜드에 똑같은 크기의, 놓여있었다.
그 우유에 매직으로 자기 이름을 써놓고 남은 양에 표시까지 하는 모습이 나를 냉장고에서 두어 걸음 물러나게 만들곤 했다.
그리고 사건은 사소한 곳에서 벌어졌다.
우유...
그날 아침에 잭클린이 부엌에서 나를 불렀다. 빈 상태의 우유통을 흔들면서.
"you drink my milk?"
하는 것이었다.
평소 한국말 영어 반반 섞어 쓰던 잭클린이었으나, 그날따라 계속해서 영어로만 물어왔다.
마신 적 없어요! 마시기는커녕 손도 댄 적 없다고요!
그 말을 하려 했건만...
이상하리만큼 입이 안 떨어졌다.
잭클린 표정이 '나 다 알고 있어. 네가 마셨단 거.'라는 확신의 상이었기 때문일까.
한 술 더 떠,
"Just say that. I won't be mad.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건데."
라고 입술을 씰룩거리기까지...
그걸 보자 내 입안이 바싹 말라버렸다.
하필 그날따라 '유당불내증'이라는 단어가 생각 안 났다.
저는 우유를 마시지 못해요... 아주 어렸을 적부터요...
나의 중얼거림 위로 '텅' 소리가 오버랩되었다.
잭클린이 남은 우유통을 쓰레기통에 내리꽂는 소리였다.
/ / /
며칠 뒤였더라?
싱크대에 누군가 먹고 치우지 않은 그릇들이 쌓여있었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집 사람들은 책임감이 별로네. 먹은 걸 안 먹었다고 우기지를 않나, 설거지를 쌓아두질 않나."
나를 향한 말이 틀림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모르는 척, 방으로 들어갔으련만.
나답지 않게 그날은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내 입이 스르륵 열리더니만,
"그깟 우유!!!"
라고, 말이 튀어나갔다.
내가 듣기에도 어색한.
볼륨조절에 완전히 실패해 버린 목소리로.
훤히 보였다. 나의 괴성에 눈살이 찌푸려드는 잭클린의 얼굴.
그럼에도 불과하고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갔다.
"우유? 설거지? 책임감? 그다음은 뭔데요?... 저기요, 잭클린. 나한테 할 말 있음 그냥 하세요, 지금처럼 뒤에서 사람 씹지 말고. 사람 뒷담화 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예요?... 그리고, 나 우유 안 마셨어요. 내 그릇은 항상 내가 씻었고요. 진짜 그깟 우유 하나 가지고... 사람을 도둑취급이나 하고..."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내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화끈.
잭클린은 왜 아무 반응 없지? 생각했는데, 웬걸. 아무렇지 않게 내 옆을 지나쳐갔다.
"Wow, you talk!"
라고, 애매모호한 웃음을 웃으면서.
결국 부엌엔 나 홀로였다.
행주를 접었다, 폈다, 난리 부르스를 피우면서 눈물을 추스르는.
/ / /
잭클린은 그 일을 더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째서였을까?
그깟 우유...
그까짓 작고 사소한 사건에, 눈물씩이나 보였던 걸까.
눈물의 이유보다는, 그동안 왜 말하지 않았을까를 되짚어봤어야 하나?
어쩌면.
말로는 도저히 담기지 않는 종류의 뭔가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