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오던 날
떠나는 준비는 예상외로 간단했다.
비행기표 결제, 짐 싸기, 영어학원 사람들에게 인사하기 등등
할 일이 적었다기보단 내 마음이 덤덤해 그렇게 느껴졌다.
다만.
{ 하지 않았던 말들 / 그리고 하지 못했던 말들 }
그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를 못살게 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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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방이 있는 집.
누구의 집도 아닌 집.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집.
셰어하우스...
짐을 쌀 때 보니 그곳은 '잠시만 머무는 곳'의 느낌이 가득했다.
거실에는 예전에 살던 사람들 흔적이 남아있었고, 부엌 서랍 속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리도구들 투성이었으며
냉장고 속엔 서로 다른 이름이 적힌 용기가 겹겹이 쌓여있었다.
누군가는 부엌에서 접시를 치웠고, 누군가는 샤워를 했고, 누군가는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분명 소리가 나는데, 소리들끼리 서로 만나지 않고 흩어졌다.
얽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혼자는 아닌 곳.
나름대로 편안한.
그와 동시에 조금 외로운.
그곳에서 나는 잠깐 나라는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구도 내 삶을 깊이 묻지 않았고, 나도 누구의 삶을 자세히 알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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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오던 날은 이상하리만큼 머리가 맑았다.
스타벅스. 반즈 앤 노블스 서점. 지하철 출입구.
그런 늘 가던 곳들은 물론이거니와 가로등이나 쓰레기통까지 눈에 들어왔다.
단지 나의 동선에 일부였던, 뭐 하나 대단할 것 없는 풍경일 뿐인 것을
‘기억해 둬야지’
라고 되뇌고 있었다.
알면서도.
내 기억이 그 풍경들을 얼마나 멋대로 왜곡시킬지, 뻔히 다 알면서도.
…
공항으로 가는 옐로캡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다.
떠난다고 말해야 할지, 말 안 해도 될지.
그러다 결국 아무에게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지만.
굳이 문장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일까?
이 도시에 왔을 때 그랬듯이, 말하지 않고 떠나는 편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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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창밖으로 집들이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로모카메라를 급히 꺼냈다.
뉴욕의 마지막 풍경을 담아 보겠답시고.
그런데...
'이 장면, 나만 알고 있자!'
하는 외침이 솟구쳐 올랐다.
세상에 나만 아는 것들이 많다 못해 흘러 넘 칠 정도인데도.
사실이었다.
내가 말 안 했으니, 알 턱이 없었다.
예비 시부모의 압박면접에 한없이 쭈그러들었던 일이라던가.
가세가 기운 우리 집을 그들이 에둘러 거절했던 일이라던가.
헤어지자는 말을 마치 기다린듯한 남자친구라던가.
또 뭐가 더 있었더라?...
나는 눈을 감았다.
모든 걸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걸, 나는 이 도시에서 배웠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때로는 뭔가를 그대로 남겨두는 방식이란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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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조금 기울었다가 다시 방향을 잡았다.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이 도시에서 있었던 일들을 누군가에게 말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지금일 필요는 없겠지.'
창밖의 구름이 서서히 흐르고 있었다.
뉴욕은
혹은 누욕은
그것도 아니면 뉴뇩은
그렇게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