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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 Dec 25. 2018

이것은 동행이며, 고행(苦行)이다

브런치 무비 패스 #06 - 영화 <그린 북>(2018)

한눈에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 잡는 포스터다. 양팔을 시트 상단에 걸친 채 당당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흑인 보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백인 드라이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더불어 한 가지 더 깨닫는다. 이 단순한 구도에 감탄할 만큼, 스스로가 여전히 편협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포스터가 암시하듯 이탈리아계 미국인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와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는 각각 극단에서 출발한 관계다. 애당초 백인과 흑인을 대립항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의 단초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리 정책 등 사상적·물리적 압력이 만연했던 1960년대에서 이러한 대립은 분명 실존했다. 그리고 <그린 북>은 이를 영화의 중심소재로 다루기로 한다. 따라서 두 인물의 대립은 이 영화에서 취할 수밖에 없는 필요악과도 같은 선택이었다.



두 사람의 여정, 혹은 한 존재의 고행


<그린 북>이 해당 선택을 영화적으로 잘 풀어낸 측면과 그렇지 못한 측면이 하나씩 눈에 띄었다. 전자는 단연 로드 무비 형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근무하던 나이트클럽의 휴업으로 일자리가 필요해진 토니가 피아니스트 셜리 박사의 투어 차량을 운전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여정이 시작된다. 토니는 체격이 좋아 고된 일도 거뜬히 해내지만 지식과 감수성이 다소 부족하다. 셜리 박사는 재능과 교양을 두루 갖춘 지식인이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고 지각하고 있기에 상당히 방어적이다.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들은 투어 시작 이후로 거의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한다.


둘의 대립이 단순히 개인적인 사유가 아닌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점을 유념할 때, 두어 개의 사건으로 그 대립이 해소되는 것은 다소 비약일 수 있다. 로드 무비는 이 맹점을 타파한다. 여정을 통해 토니와 셜리가 서로를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게 확보된다. 그들은 그 시간 속에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오해를 풀어간다. 머리 속에 그려왔던 상대의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부순다. 모든 배경을 걷어내고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로 마주한다.


인격체. 이 단어를 곱씹자 <그린 북> 속 여행의 또다른 목적이 형체를 드러낸다. 이 여행은 토니와 셜리의 동행인 동시에 한 남자의 고행이다. 투어가 남부를 향해 갈수록 인종 차별은 더욱 노골적으로 자행된다. 경찰은 이렇다 할 명분 없이 셜리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를 초청한 주최 측은 귀빈 대접을 하는 듯 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에는 선을 긋고 부당하게 대우한다. 셜리의 말쑥하고 고급스러운 차림새에 흑인들 역시 싸늘한 눈총을 보낸다. 그러나 셜리가 이 모든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적합하다. (실제 영화 속에서 셜리의 동료에 의해 간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린 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겠노라 온 몸으로 선언하는 한 인물의 고귀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코 서로 다른 두 개의 여행이 아닌데


아쉬운 것은 ‘동행’과 ‘고행’의 결이 종국에는 두 갈래로 나뉜 채 이야기가 마무리됐다는 점이다. 영화 전반에서 셜리는 토니에 의해 철저히 ‘보호’ 받는다. 혹자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단순 보호-피보호 관계의 문제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셜리 박사가 자신이 만든 방어막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길 바랐다. 그런데 그것이 영화 초반에 보였던 그의 위풍당당함과 고귀함이 빛 바래는 것과 동일시 된 듯해 안타까웠다.


토니는 셜리에게 끊임없이 ‘나 없이는 어디도 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수많은 갈등과 위기 속에서 셜리가 토니의 도움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을 찾기 힘들다. 이에 유일하게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시퀀스는, 두 사람이 백인 경찰에 의해 부당하게 구금 됐을 당시 셜리 박사가 전화 한 통으로 백인 경찰들이 당황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하지만 셜리 박사가 전화를 걸었던 인물 조차 백인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자신의 고귀함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간 순간은 어디인지 묻게 된다.


반대로 토니가 셜리로부터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의 재능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 그리고 아내를 감동시킬 수 있는 편지를 쓰는 방법이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언행을 개선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초반부부터 토니를 과격하지만 따뜻하며 거칠어도 인정적 도리는 다하는 인물로 꾸준히 묘사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그의 물리력을 이용하려는 인물들이 여러 차례 토니에게 접근하지만 토니는 그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가족에 대한 그의 애정과 책임감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약간의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괜찮은 아저씨 토니는, 애당초 깨고 나올 세상의 표피가 그다지 두껍지 않았다.



두 개의 세상이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서로를 응시하며 여정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따뜻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던 것은 분명하다. 생각해 볼 여지도 가득 남겨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결국 하나의 세상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 쪽으로 포섭된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충돌하고 화해하면서도 각자의 방향성을 잃지 않을 순 없는 걸까. 2019년에는 그런 영화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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