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 패스 #09 - 영화 <우상>(2018)
*약 스포주의*
영화의 제목은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최근 개봉작만 예시로 들어도 그렇다. <캡틴 마블>은 주인공의 이름이다. <이스케이프 룸>은 소재이자 배경이다. <악질경찰>이라는 제목은 앞으로 어떤 내용이 펼쳐질 지 짐작케 한다. <돈>은 소재이기도 하지만 메시지와도 연관성이 깊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상>은 어느 쪽일까. 개인적으로 앞서 언급한 예시 모두에 해당한다고 본다. <우상>에서 '우상'은 인물이자 소재이며, 줄거리이자 메시지, 그 모든 것이다.
명회(한석규)는 유력한 차기 도지사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뒤 모든 것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사고의 진실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그를 조여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실은 명회를 도리어 '우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다. 아들을 자수하게 해 자신 역시 평생을 사죄하고 살아가겠다는 청렴결백한 정치인으로서 명회의 이미지가 생산된다. 분명 명회도 처음엔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숱하게 되뇌이며 마음을 다 잡았을 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맹목적으로 좇는 일에 집중하며 마음 속 우상의 몸집을 키워 간다.
명회의 아들이 낸 교통사고로, 중식(설경구)의 아들이 죽는다. 중식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절뚝거리는 다리로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끝내 진실에 도달한다. 다수의 영화가 사건의 진실에 가 닿는 순간을 클라이맥스로 그린다. 하지만 <우상>에서는 해당 신이 기승전결의 '전'에 해당한다. 중식은 현실을 직시하고도 정의를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인 소시민이다. 그는 끝내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의 아버지인 명회의 선거캠프 홍보팀장이 된다. 이렇듯 중식이 현실과 타협하는 순간은, 그가 우상을 섬기기로 결심하는 순간과 일치한다. 명회가 우상이 된 순간 중식은 저항할 힘을 잃는다.
러닝타임의 절반이 넘어가도록 련화(천우희)는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이는 맥거핀에 가깝다. 련화의 진가는 후반부에 드러난다. 그는 세 명의 중심인물 중 유일하게 우상에 목메지 않는 인물이다. 명회나 중식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거친 인생살이를 지나 온 련화는 우상이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 집착한다. 저 멀리 실체도 보이지 않는 행복의 순간을 상상하는 대신, 눈앞의 안위를 챙긴다.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하게 보복한다는 련화에 대한 소문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명회를 망설임 없이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상'은 이 영화의 전부이다. 우상은 인물들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작동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것이 우상을 긍정하는 삶이든, 부정하는 삶이든 말이다. 눈 여겨 볼 점은 그 어떤 순간에도 우상은 굳건했다는 사실이다. 저 밑바닥에서 개미 같은 인간들이 우상을 섬기고, 포기하고 또 다시 받아들이고 부정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에도 우상은 단 한 번도 그 힘을 잃은 적이 없다. 마치 태풍이 몰아쳐 모든 것을 난장으로 만들어도, 정작 그 중심에서 고요를 누리는 태풍의 눈과도 같다. <우상>이라는 영화 전반에 감도는 위압적 분위기는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