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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 Aug 20. 2019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브런치 무비 패스 #13 - 영화 <우리집>(2019)

최근 읽고 있는 책 두 권이 있다. 하나는 수필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이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읽다 보니 두 개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자는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소설에서 인물들은 대개 비슷한 일을 겪는다. 문득 사건이 발생한다. 평범한 사람이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고뇌한다. 마침내 치명적인 진실을 손에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신이 더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후자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집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다. 그중 책 제목과 똑같은 이름의 단편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에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의 시간과 그녀의 시간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는 순간, 그는 아무리 영원히 찾아 헤매더라도 잃어버린 4월의 시간만큼은 절대로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이야기 모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슬픔’에 대해 토로한다. 그런 이야기들에 집중하고 있던 탓일까. <우리집>을 보는 관점 역시 이 이야기들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집>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한 아이들의 ‘노력’이다. 하나(김나연)는 불화가 쌓일 대로 쌓인 가족의 화목함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유미(김시아)는 또다시 이사를 가야 할 위기에 놓이자 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아이들의 노력은 불가항력에 대한 노력이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와 유미 모두 자신들이 노력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순진함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나는 요리를 좋아하는 아이다. 대사로 직접 언급된 적은 없으나 하나는 집밥이 가지는 따뜻한 힘으로 엄마, 아빠 그리고 오빠를 한 자리에 두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런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끝에 가서 소통의 가능성이 암시되기도 하지만.) 하나가 가족 여행을 계속 제안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결국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하나가 원하는 여행이 결코 아니었다. 유미는 어떠한가.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집을 보러 찾아오는 부동산 중개인과 예비 세입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유미는 집을 계속 어지럽힌다. 우리 집은 아주 덥고 지저분하다며 흉을 보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비록 집에 들어오기로 했던 새 세입자가 결정을 보류하긴 하지만, 이러한 선택에 유미가 미친 영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아이들 역시 깨닫기 시작한다. 노력만으로는 모든 게 해결될 수 없다는 것. 마음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도 집을 지키지 못한 아이들은 이제 아무것도 몰랐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슬퍼해야만 할까? 이를 보는 관객 역시 안타까워해야만 하는 걸까? <우리집>의 결말은 이에 대한 감독과 배우들의 답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상심하지만 주저앉지는 않는다. 현실을 온몸으로 부딪히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때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와 유미가 각자의 ‘집’ 앞에서 보여준 의연함은 누구도 쉬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집>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시선과 사고방식을 미화하지 않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 지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이들은 물론, 우리 역시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이 곧 상실의 정의는 아니다. 다만 그 빈자리를 표현할 단어로 ‘성장’ 혹은 ‘어른스러움’ 같은 것들을 데려다 놓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망설여진다. 아이답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은 아니며, 어른스럽다고 해서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우리집>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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