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일 일요일
'사람은 다양한 면을 갖고 있다'는 말과 대치되는 문장은 어쩌면, '앞뒤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이 아닐까. 실제로 후자는 내가 추구했던 인간의 이상향이자 관계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얼마나 어불성설인지 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인데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굳이 타인의 관점을 끌고 오지 않더라도 비슷한 사례는 찾기 쉽다.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가도 의외의 면을 발견하고 실망한다.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한 이후 그 사람의 따스한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어.'라고 생각을 고쳐먹기도 한다. 그러다 또 불쾌한 일을 당하면 생각은 손바닥 뒤집듯 바뀐다. '아. 역시 그렇지.' 그때마다 늘 혼란스럽다. 상대의 비일관성에 속은 기분이 든다. 저 사람의 좋은 면과 좋지 않은 면 중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스스로 질문한다.
요즘은 생각한다. '앞이 어디고, 뒤는 또 어딘데?' 모든 종류의 이분법을 의심하고 살겠다 결심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습관의 관성은 드러난다. 앞과 뒤는 결국 없는 개념이다. 오히려 한 사람 안에 '컬러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보는 게 훨씬 합당하다.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운 총천연색 띠가 개인을 구성한다. 그중 내가 본 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한 개인에 대해 각자가 발견한 색깔이 어쩌다 보니 같을 수 있다. 그리고 그만큼과 같은 확률로, 두 명의 타인이 보색에 해당하는 각각의 색깔을 목격했을 수도 있는 법이다.
나 자신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종종 스스로도 익숙하지 않은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나답지 않게 차가운 말을 내뱉고 하루 종일 신경 쓴다. 나답지 않게 갑자기 나서서 총대를 멘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말들에서 '나답지 않게' 따위의 수식어는 빼 둘 작정이다. 내가 나 자신을 검열하기 시작한 것도, 나의 차가운 면 혹은 대책 없는 면을 내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사실은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모든 게 나다. 어쨌든 모든 행동의 실행 여부를 판단한 건 나다.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진심으로 사과하기를 미루지 않았던 것 역시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잘못만 기억하는 누군가는 결국 나라는 사람의 일부분만 보겠다고 결심한 것일 테니까. 그 결심도 존중하지만 못지않게 내 자존감도 존중하기에. 나는 '그건 내가 아니야'라며 부연 설명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해명을 바라지 않을 생각이다. 당신은 내게 노란색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파란색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