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들린다> 외 9편
나는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 아주 빠르게, 깊이 빠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더불어 흥미를 잃을 때도 굉장히 빨리 빠져나온다. 이런 내가 10년가량 한 번도 질리지 않은 일이 있다. 바로 영화를 보는 일. 시간이 없어서 못 볼 때는 있어도,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영화를 쉬는 일은 없었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영화를 가지고 무슨 일이든 해보고 싶은데 그게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혼자 생각하고 기록해뒀던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 내야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것만큼은 이제 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이것도 어디서 본 영화 속 대사 같은데. (?) 그런 의미에서 정리해보는 '2020년 상반기에 본 영화들'. 때마침 오늘이 6월의 마지막 날이다. 총 20편의 영화를 보았고, 두 개의 글에 나눠서 정리해본다.
<바다가 들린다> (1993)
시티팝 감성이 유튜브에서 대유행하는 2020년 한국. 재생목록에서 썸네일로 자주 보이는 이미지 출처가 궁금해 찾아봤더니 스튜디오 지브리 초기 TV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 속 장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주얼이 중요한 시티팝 감성에 어울리는 만큼, 아트워크가 굉장히 감각적이었다.
하지만 작품 측면에서는? 사실 그만큼 좋은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도시 소녀에 매료된 시골 소년의 이야기. 문제는 그 '도시 소녀'에게서 매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거다. 그저 '도시에서 왔다'는 사실만으로 풍기는 아우라 때문이 아니었을 싶을 정도로 이기적이고, 철없고, 답답한 캐릭터. 그러나 이 영화를 '뭣도 모르던 어린 날의 기억에 대한 헌사'라고 생각한다면, 영화를 이해하기 조금 편해진다.
영화 특유의 감성과 사운드트랙만큼은 정말 최고였다. 그냥 가끔씩 아이패드에 띄워 놓고, 달리 할 일을 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영화든 시리즈든 영상물은 무조건 화면을 끝까지 보고 있어야 한다는 나의 가치관에서 벗어난 최초의 영화일 지도.(굉장히 뜻밖의 계기이지만.) 그만큼 스토리에 미련이 생기지는 않는 영화였다.
*제 평가는요: 그럭저럭
<두 교황> (2019)
영화가 주로 대화를 통해 이어지는 측면 때문에,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했다. 대화의 내용은 직관적으로 읽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두 인물은 흡사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하며 이분법적, 정치적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대화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양심'이라는 주제가 두 사람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카메라 홀딩 기법도 다큐멘터리 같아서 특이했고, 굉장히 홀리(?)한 장면들에 대중가요를 두는 사운드트랙도 정말 매력적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모두의 잘못입니다." - <두 교황> 중에서
*제 평가는요: 추천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2017)
뉴욕 공립도서관의 행사, 사업, 재정, 직원 교육, 지역 사회(지역 공동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그것들이 향하는 목적성(교육과 정보의 평등) 거짓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장소로서 도서관을 제시한다.
이 영화가 긴 이유는(무려 3시간 26분...^^) 강연/포럼/행사의 '내용'이 아닌 '행동과 일 그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세스 영화'('김혜리의 필름 클럽'에서 배운 단어다!)가 참 좋은 건 바로 이 지점 탓이 크다. 모두들 '내용물'에만 집중하려고 혈안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아니 정말 일정 시간만큼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큰 그림, 돌아가는 구조, 개관을 보는 데에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럴수록 경험하게 되는 것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늘어나는 것 같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말을 빼곡히 받아 적는 것보다, 수업의 주요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진짜 공부인 것처럼 말이다.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만들고 모양을 냈는지 묘사할 때, 과정을 경시하지 마세요. 만드는 방식이 우릴 정의하니까요." - <뉴욕 라이브러리> 중에서
*제 평가는요: 추천
<우먼 인 할리우드> (2018)
'법은 생각과 마음은 못 바꿔도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말, '남성이 여성보다 돈을 많이 받으면, 당연히 회사에서는 남성 인력을 외부에 추천한다'는 말, '경험 있는 인력을 원하지만 그건 경험할 기회를 줘야 가능하다'는 말 등등.
이 영화는 평소 내가 추상적/감정적/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했던 성 평등의 개념에 구체적/법률적/시스템적 관점까지도 봐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인식 그 자체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나부터가 스스로 납득되지 않으면 잘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인식을 바꿀 수 없다면 법부터 바꿔야 한다.
"CSI에서 여성 법의학자가 나온 뒤 법의학 분야 여성 비율이 현저히 높아졌어요. (...) 소녀들이 이 드라마를 정말 좋아해 줬어요. 너무 뿌듯하더라고요. 지금은 현장 인력 절반이 여자래요." - <우먼 인 할리우드> 중에서
"무의식적인 성 편견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내면 그 결과는 엄청날 거예요. 문화를 바꿀 수 있어요.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 <우먼 인 할리우드> 중에서
*제 평가는요: 추천
<고양이의 보은> (2002)
스토리만 봤을 때에는 매우 단순해서 아쉬운 점이 조금 있다. 하지만 그저 예쁜 동화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괜찮은 작품. '너의 시간을 살아라'라는, 비교적 명확한 메시지를 귀엽고 예쁜 소재들로 풀어내서 참 좋았다. 단순한 동화였지만,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전달하려 노력한 듯해 좋았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고양이를 구한 것도, 모든 일이 꼬인 것도. 모두 소중한 나의 시간이었어." - <고양이의 보은> 중에서
*제 평가는요: 그럭저럭
<바닷마을 다이어리> (2015)
한 번 본 영화는 웬만하면 다시 보지 않는 내가 개봉 이후 여름 이 맘 때가 되면 매년 다시 보는 영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에는 그저 미장센 보는 맛으로 봤던 게 컸다. 내가 어떤 '느낌 있는 영화를 보는 것'이 중요하던 때였다.
하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다시 볼 때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추가적으로 샘솟는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듯한 곳에 있을 때 드는 감정, 낯선 사람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볼 때 드는 감정 등등. 어른이 된다는 말이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여기가 네 집이야, 언제까지나." - <바닷마을 다이어리> 중에서
*제 평가는요: 추천
<풀잎들> (2017)
'나도 언젠가 저렇게 나의 인생을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는 게 힘들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했다. 사는 건 즐겁고 새로운 일로만 가득한 줄 알았으므로. 하지만 이젠 종종 친구들과 그 말뜻이 뭔지 알 것 같다는 이야길 하곤 한다. 사는 것은 고통이 맞다. 하지만 이건 내가 고통을 새롭게 느끼는 것이라기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나 자신의 감도가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을 테다.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면 뭔가 너무 두려운 게 나올까 봐." - <풀잎들> 중에서
*제 평가는요: 그럭저럭
<한여름의 판타지아> (2014)
다시 보니 더 좋은 영화. 첫째로 고조 시와 시노하라가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았다. 둘째로는 1부의 이야기 및 오브제들을 바탕으로 2부가 만들어지는 구성이 정말 좋았다. 마치 꿈같았다. 실제로 현실에서 보고 생각한 것들이 꿈에 반영되는 것처럼.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에는 난해하다 생각했고, 실제로 보기가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다시 볼 땐 아주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기승전결이 확실하지 않아도, 감독이 전달하고 싶은 명확한 메시지가 읽히지 않아도, 그저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테마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영화라고 느꼈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나의 이해가 깊어진 걸까? 어떻게 깊어진 걸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았던 경험으로? 혹은 5년 동안 봐 온 영화 365편으로? 둘 다 맞을 것이다. (*실제로 감상한 영화들을 2016년부터 리스트업 해오고 있는데, 이 영화를 처음 감상한 이후 365편의 영화를 거쳐 다시 2020년에 두 번째 감상을 맞이했다.)
"꿈을 갖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꿈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뭐랄까.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한여름의 판타지아> 중에서
*제 평가는요: 추천
<벌새> (2018)
은희의 이야기가 결코 유별난 것이 아니며, 그때 당시에는 모두의 이야기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 아팠다. 하지만 영지 선생님처럼 길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부러웠다. 게다가 그 영지 선생님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정말 좋았다. 영지 선생님 역시 모르는 것이 많고, 알아가는 단계이지만 그는 자기보다 어린 은희를 바르게, 그리고 조금 더 (아이의 자존감과 가치관에) 안전한 방향으로 이끌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거 같아.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아,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하고.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때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거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 <벌새> 중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줄게." - <벌새> 중에서
*제 평가는요: 추천
<하이큐!! 땅 VS 하늘> (2019)
학원물과 스포츠물이 결합된 '하이큐'는, 학교별로 테마/컨셉을 지정해주고 이를 통해 덕후 몰이를 하는 데 이미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마치 K-POP 아이돌이 작동하는 방식.) 이름부터 '까마귀'를 상징하는 카라스노고교, '고양이'에서 착안한 듯한 네코마고교, 그리고 배구부의 에이스인 보쿠토의 외양만 보아도 '부엉이'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게 확연히 느껴지는 후쿠로다니학원, 강호 고등학교의 명성에 어울리는 '독수리'를 상징으로 활용하는 시라토리자와 등등.
개인적으로 하이큐 4기 1쿨에 이르기까지,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카라스노보다 네코마 또는 후쿠로다니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온 터였다. 둘 중에서도 네코마고교에 특히 호감이 갔다. 어느 한 명의 에이스가 나서 드라마틱한 활약을 하기보다 모든 선수들이 고양이처럼 조용히, 하지만 내실 있게 각자의 포지션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해내는 팀 플레이가 매력적이었다. 그들의 구호는 '이어라!'인데, 소위 '혈액'이 되어 뇌 역할을 하는 세터(=켄마)가 체계적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이어 나가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하이큐' 시리즈의 매력은 캐릭터 각각 뿐만 아니라 하나의 팀을 두고도 세밀한 기획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그런 마당에 이렇게 네코마의 이야기를 다룬 OVA가 나오다니 취향 저격을 당했을 따름. 딱 거기까지 였지만 말이다.(^^) 점점 하이큐에게 서사를 기대하지 않게 되는 건 기분 탓일까!
*제 평가는요: 그럭저럭
이렇게 2020년 상반기에 본 영화 총 20편에 대한 정산을 마쳤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극장 방문이 어려워지고, 덩달아 신작들이 줄줄이 개봉을 연기한 탓에 새로 많은 영화를 보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OTT/VOD 서비스들이 앞다투어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더 많은 영화를 보지 못한 건 오히려 나의 게으름 때문일 수도? 남은 하반기는, 또다시 12월 말에 몰아서 하반기 정산을 하기보다, 매달 월간 정산을 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체 언제 어디서 능력을 발휘하게 될지 모를 나의 덕력이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