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배우다

by 고미젤리

코로나로 암울한 시간을 보내던 중, 친구 소개로 연극 강좌를 신청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엔 연극 감상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강좌 계획안을 자세히 보니 수강생들이 직접 연극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문득 TV에서 유재석이 다양한 이름으로 여러 캐릭터를 실현해 보는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처음엔 생각도 못한 역할을 수행하며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더니, 드럼에 트로트 가수에 아이돌까지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그가 마냥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유재석이야 연예인이고 내용 자체가 도전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당장 글로벌 스타로 탈바꿈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연극은 전혀 다른 타인이 돼 보고 싶다는 나의 꿈을 실현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두 학기 동안 연극을 배우게 되었다.

봄 학기에는 희곡 ‘원미동 사람들’ 속 15분 정도를 발췌해 진짜 연극처럼 꾸며보았다. 멋진 조명이나 효과음은 없는 무대였지만, 어설픈 분장에 소품까지 챙겼더니 진짜 연극배우가 된 느낌이었다.


이 연극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쌀가게인 김포상회를 운영하는 경호 아빠였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나름 주인공이지만, 발췌본에서의 대사는 몇 개 안 됐다.

나는 쌀만 팔아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슈퍼로 업종을 바꾸고, 원래 있던 형제 슈퍼의 젊은 김반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나는 40대 아저씨를 표현하기 위해 남편 옷을 꺼내 입고 목소리도 바꿔봤지만 진짜 경호 아빠가 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수 십 번 연습 끝에 공연을 카메라에 담고, 관객 없는 커튼콜까지 재현해 보고 나니 큰 성취감이 밀려왔다. 우리는 서로의 연기를 칭찬하고 조언하며 정말 행복하게 강좌를 마무리했다.



다음 가을 학기는 코로나가 다시 극성이라 대면 수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똥강리 미스터리’라는 연극으로 라디오 극장을 만들어 보았다. 이 희곡은 시골 똥강리에서 강배라는 청년의 어이없는 죽음을 다룬 코믹 미스터리다. 등장인물에 비해 수강생이 적다 보니 나는 새댁과 백미라는 2명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우선 극 중 새댁은 남편이 타지에 나가 혼자 지내는 외로운 여인으로, 사실 죽은 청년 강배의 옛 애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명색이 새댁이다 보니 겉으로는 얌전한 척, 부끄러운 척 다 한다. 내가 매일 집에서 연습한다고 새댁의 대사를 읊으면 남편과 아이가 웃고 난리였다.

“성님은 지를 부끄럽게 해유.”

새댁은 남들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도 혼자 야하게 해석하며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역할은 여고생 ‘백미’였다. 백미는 이장의 딸인데, 이름처럼 백치미가 느껴지는 눈치 없는 아이다. 다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어이구. 또 백미여, 백미.’하면서 무시하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푼수 여고생에 새침데기 새댁이 되어 보겠는가? 비록 목소리로만 하는 연기였지만 둘 다 여자 캐릭터이다 보니 예전 경호 아빠보다 표현하기도 쉽고, 개성이 뚜렷한 역할을 맡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하지만 비대면 상황에서 빠른 대사를 막힘없이 주고받는 ‘합’을 맞추기 어렵고, 별 다른 동작 없이 소리로만 감정을 나타내기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난번 같은 커튼콜이 없는 것도 많이 아쉬웠다. 극이 끝난 후 모든 출연자들이 무대에 나란히 서는 순간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슴 가득 밀려오고, 가상의 관객이 지르는 환호까지 더해지면 그 희열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학기 연극 수업을 하고 한창 재미를 느껴가고 있었지만 작년에는 연극 강좌가 폐강되었다. 자세한 이유야 모르지만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대면 수업이 힘들고, 수강생 수가 적어 그렇게 되었을 것 같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때의 연극 영상과 녹음파일을 재생해 보곤 한다. 정말 누가 볼까 두려운 발연기라 보여주기 민망하지만, 맨 마지막 커튼 콜 부분은 같이 나누고 싶다. 다 같이 손을 잡고 인사하는 우리들의 얼굴이 얼마나 밝은지, 그 표정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배우였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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