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특권 의식, 또는 뒷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 (표준 국어 대사전)
10년이 넘게 꾸준히 수영을 하고 있다. 물장구부터 시작했던 수영이 지금은 모든 유형을 마스터하고 50분 동안 25미터 레인을 30바퀴 이상 운동한다. 수영이 너무 재미있어서 강습을 거의 빠진 적이 없고, 집에서도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며 예습, 복습도 한다.
하지만 수영을 오래 다니면서 매번 적응이 안 되는 것은 ‘텃세’라는 못된 관행이다. 그 수영장에서 조금 더 운동했다는 것이 대단한 특권인 양, 때로는 자기가 그 수영장 주인인 줄 착각할 정도로 자신의 권리에 대해 과대 평가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다행스럽게 그 정도가 예전보다 약해졌고, 스스로의 자정 노력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소소한 텃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새벽 6시 반에서 처음 수영을 시작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끝나고 같이 아침을 드시는 거 같긴 했지만 직장인인 나에게 같이 가자는 말씀은 없으셔서 텃세라는 것을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오전 주부 반으로 옮기면서 말로만 듣던 악명 높은 텃세를 경험하게 되었다.
새벽반은 상 중 하반이 오른쪽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주부반은 그 반대였다. 당시 내 실력은 중급 정도였는데, 나는 내가 어느 레인으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일단 새벽반 하급 레인으로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거기가 주부반의 상급이었던 것이다. 이미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친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 온 신입이 바로 상급으로 들어오려 하다니 자기들의 질서를 깨는 일이었다. 다행히 선생님이 새벽반도 하시는 분이라 나를 알고 있었고, 이제 상급에서 해도 될 거 같다며 그 레인에서 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선생님의 승인까지 있었지만 이 아줌마들의 괴롭힘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맨 뒤에서 천천히 쫓아가며 이들의 속도를 가늠해 보려고 했는데, 앞사람이 느려도 너무 느렸다. 조심스레 내가 먼저 가도 되겠냐고 했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를 내어주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 아줌마 이제 그 속도가 거의 물속의 우사인 볼트다. 계속해서 내 발바닥을 치고 턴 할 때마다 위협하더니 도착하자마자 나보고 뒤로 가라고 한다. 같은 레인의 다른 사람들도 그 아줌마에게 맞장구를 치며 여기 레인은 모두 상급이고 우리는 몇 십 년 수영을 한 사람들이라며 엄청난 자부심을 보인다.
어쨌든 첫날 수영을 마무리하고 정리 체조까지 끝나자, 뒤늦게 나에게 자기소개를 하라고 한다. 항상 수영을 끝내고 나면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는 나는 정말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름만 말하고 잘 부탁드린다고 짧게 끝내려고 했다. 그랬더니 뒤이어 쏟아지는 아줌마들의 질문이 거의 형사 취조 수준이다. 나이는 몇이냐, 애는 몇 살이냐, 어디 학교냐, 남편은 뭐 하냐, 집은 어디냐. 여러 사람 앞에서 답하기에 많이 민감한 내용들이다. 나는 그냥 수영만 열심히 하겠다고 마무리 발언을 하며 그들의 질문을 일축해 버렸다. 뒤이어 샤워실에서 한 분이 나에게 결혼했냐고 대뜸 물으신다. 사교성이 많이 떨어지길래 노처녀인 줄 알았다며, ‘신입이면 먼저 사근사근해야지’라고 하신다. 어이상실이다.
이제 미운털이 잔뜩 박힌 나에게 그들의 텃세는 정말 촘촘하게 다가왔다. 샤워실에서 자기들끼리 자리를 맡아 두고, 빈자리인 줄 알고 쓰려고 하면 내 자리라며 당당하게 내쫓는다. 한 번은 누가 와서 내 팔을 찰싹 때리더니 모자 바깥으로 내 머리카락이 삐쳐 나온다고 제대로 쓰라고 한다. 머리가 짧아서 이게 최선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렇다고 그렇게 세게 때리시냐고 항의했더니 듣지도 않고 가버린다. 나는 그러든지 말든지 수영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자기들끼리 탈의실에서 웃으며 음식을 나눠 먹고 소란을 피우다가도 내가 지나가면 무언가 잔소리를 하던지 소곤대며 험담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냥 적당히 무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대절해 전주에 놀러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한다. 그 무리 중 한 분이 같은 단지 분이셨는데, 아마 내가 좀 안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마음 불편한 사람들과 어디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안 간다고 했다. 그분은 나보고 혼자 그러면 안 된다고, 수영만 하지 말고 끝나고 같이 밥도 좀 먹고 어울려 다녀야 된다며 내가 건방지다고 소문이 났다는 충고인지 지적인지 모를 말을 했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라면 적어도 호의를 보여 줬어 야지, 저렇게 자기들에게 잘 보이라는 식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과 싸우면서 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냥 강습 시간을 옮겨 버렸다.
이제 나에게도 이 수영계에 특정된 인간관계에 대한 노하우가 생겼다. 여전히 운동만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래도 수영이 끝나고 나면 자진해서 오리발이나 킥판 등을 정리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명절 촌지는 불평 없이 내지만, 매달 모임은 바쁘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않고 회비도 내지 않는다. 지난번 단체 모자를 나눠주며 쓰라고 하는 회원이 있었지만 잘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쓰지 않았다. 그 시간대 팀 이름을 본인의 이름으로 하는 건 물론, 모자에 자기 이름까지 새겨 주었기 때문이다.
긴 코로나 기간 수영을 쉬다가 작년 사설 수영장으로 옮겼다. 그렇게 몇 개월 새 수영장에서 운동하던 중, 예전 나에게 지적질을 해대던 분이 우리 반으로 들어오셨다. 예전의 그 당당한 눈빛이 엄청나게 순해져서 그나마 안면이 있는 나에게 친한 척 다가서신다. 상급반에 계시며 나를 쫓아내신 분이라 당연하다는 듯 내 앞 1번으로 서셨지만, 코로나로 오래 쉬어서인지 그분 때문에 뒤로 긴 정체가 생긴다. 결국 다른 회원 한 분이 그분에게 자리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고, 그분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며 돌아갔다. 며칠 후 길에서 만난 그분은 새로운 반 들어가는 거 너무 힘들다고, 왜 내 돈 내고 스트레스받으며 운동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어 다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갔다고 하신다. 내가 보기엔 그분이 내게 하셨던 거에 비하면 진짜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아마 남들이 자기에게 텃세 부릴까 지레 도망간 거 같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다른 사람의 험담을 했다고 한다. 험담은 정보의 전달이라는 긍정적 역할도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집단의 화합을 위해 모난 돌을 골라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몇몇 수영장은 아직 원시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냥 새로 온 사람이 불러오는 변화가 싫어서, 자기들의 하찮은 질서가 깨지는 것이 싫어서 무조건 배척하고 보는 이런 텃세, 이제 옛날이야기처럼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