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면 살을 빼세요

by 고미젤리

결혼하자마자 여러 가지 갈등이 생겼다. 둘만 좋아서 하는 게 결혼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나만 참고 견디기에는 같이 살아갈 세월이 너무 길었다. 이유 없이 눈물이 줄줄 흐르거나 좁은 방 안에서 벽만 보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친구나 가족에게 이야기해도 결국 그런 선택을 한 나를 탓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속 시원히 털어놓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무작정 병원에 갔다. 당시는 주 5일 근무가 아니라 나는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친 후 퇴근하는 길이었다. 집에 가기도 싫고 만날 사람도 없던 시간, 어느 건물 간판에 선명한 ‘정신과’라는 상호가 눈에 띄었다. 사실 그 병원을 본 건 오래전이지만 차마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그날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끌리듯 병원으로들어섰고, 잠깐의 망설임 후 용감하게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토요일 오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까지 왔구나 싶어 우물쭈물했던 내가 좀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접수를 하고 한참을 기다린 후 드디어 나를 부른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시 나갈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 나가면 헛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겨우 참았다.


그렇게 대면한 의사가 나에게 한 첫마디를 잊을 수 없다.


‘어느 정도 감량을 원하세요?’


이게 무슨 황당한 질문인지. 나는 다소 기죽은 목소리로 우울증 상담을 받고 싶다고 말끝을 흐렸다. 의사는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크게 당황하면서도 의사다운 근엄함을 잃지 않으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자신의 병원이 정신과가 맞지만, 다이어트 클리닉도 같이 하고 있어서 착각을 했다고 멋쩍게 웃기까지 했다. 그제야 대기실 가득한 여자들이 이해가 됐다. 왜 그들이 내가 들어서자마자 나를 아래위로 흩었는지, 아마도 내가 이 병원을 다닌 다이어트 성공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20대였던 나는 적정 수준의 몸무게였지만, 뒤늦게 되돌아본 대기실의 그녀들은 다소 과체중으로 보였다.


나는 본래의 의도를 잊고 획기적인 다이어트 보조제를 처방하고 있다는 선전 문구와 의사의 책상 가운데 자리한 실물 모형의 지방 덩어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 약이 어느 정도 다이어트 효과가 있는지 물었고, 본업을 잊은 의사도 보장할 수 있는 감량은 지금 내 몸무게의 10% 정도라며 효능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정도의 감량이라면 통통했던 초등학교 시절 인생 최저점과 비슷해질 것 같아 약간의 유혹을 느꼈지만, 어쨌든 우리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질문지 몇 장을 건네주며 작성해 오라고 했고, 다음에 오면 상담 후 우울증 약도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병원 문을 나오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기껏 갔는데 우울증 얘기는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고 살 빼는 소리나 듣고 오다니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됐다. 하지만 거기까지 걸어 들어간 내 용기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결국 그 병원에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다. 대신 황당한 사연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나의 우울한 마음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내가 병원도 다녀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던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우울증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살을 부추기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잠깐 병원 한 번 가 본 걸로 우울증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기분이 다운될 때 우울한 사람끼리 만나는 건 좋을 게 없는 것 같다. 상황을 개선해 보려 해도 혼자 힘으로 도저히 힘들다고 생각된다면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의지로 도움을 요청하려는 손짓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좋아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그래서 나는 우울해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우울하면 살을 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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