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 승무원이 되고 싶었다. 4킬로가 넘는 우량아로 태어나 항상 ‘뚱뚱’과 관련된 별명을 달고 살아왔지만 대학 4년 동안 살이 많이 빠져서 신체검사는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다지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은 아니지만, ‘승질머리’하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큰 언니가 이미 승무원이었으니 나라고 못 할까 싶었다. 물론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절도 아니었기 때문에 안 되면 그만이지 싶은 생각도 컸다.
나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어느 외국계 항공사에 지원했다. 4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하기 전 어느 날, 남산의 호텔로 향했다. 넓은 연회장은 이미 지원자들로 가득했고, 나도 그들과 섞여 지원서와 이력서를 제출했다. 항공사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서류를 받으며 몇 가지 영어 질문을 해서 약간 당황했지만 그럭저럭 알아듣고 대답했더니 다음 시험 일정이 쓰여 있는 엽서를 한 장 주었다. 웅성거리는 지원자들로부터 얻어들은 바로는 그 짧은 시간이 1차 면접이었으며, 떨어진 사람에게는 엽서를 주지 않고 그냥 ‘고맙다. 다음에 연락하겠다.’라고만 했단다. 내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엽서를 받았냐고 물었고,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에 우물쭈물 얼버무렸다.
며칠 후 필기시험과 듣기 평가가 있었다. 취업과 관련된 필기시험도 처음이었지만, 모두 영어로 되어 있는 시험지가 낯설었다. 다행히 그전 달에 토익 시험을 한 번 본 적이 있어 비슷한 마음으로 치렀다. 지금은 거의 취업 전쟁이라고 할 만큼 영어나 면접까지 모두 열심히 공부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토익 시험도 이제 막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유학을 위한 토플은 그나마 들어봤지만, 토익은 모두 낯설었다. 어쨌든 그런 어설픈 시험 경험이 도움이 되어 어느새 2차까지 합격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어려운 면접이 남았다. 나는 평소 잘 신지도 않는 높은 하이힐에 짧은 정장 치마까지 차려입고 호텔로 향했다. 하지만 호텔에는 그 어떤 공지도 보이지 않았고,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지원자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프런트 데스크에 물어보니 오늘 그 항공사 면접은 없다고 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대고 있자니 호텔 직원 한 분이 어딘가로 연락을 취해 주셨다. 알고 보니 날짜가 변경되어 모두에게 공지를 했다는데, 나만 못 받은 것이었다. 담당자는 미안하다며 몇 월 며칠 다시 오라고 했다. 정말 김 빠지는 날이었지만, 호텔 직원분이 이게 좋은 신호일 수도 있다고, 다음에 꼭 붙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덕담을 해 주셔서 그나마 맘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정해진 날짜에 다시 호텔로 향했다. 면접 방에는 2명의 외국인 있었고, 약 3-40분 꽤 긴 시간면접이 이어졌다. 왜 승무원이 되고 싶은 지, 평소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 승무원과 관련된 질문도 있었지만, 4칸짜리 만화를 보여주고 상황을 설명하게 하거나,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외국인과 이야기해 본 적도 별로 없고, 승무원 업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던 나는 횡설수설 버벅댔다. 상황 면접 중 한 면접관이 자신이 비행기에 탄 손님이라고 생각하라더니, 미국에 가려면 비자가 필요한지 물었다. 솔직히 나는 비자가 신용카드 이름인 줄 알았다. 그래서 ‘쇼핑하고 싶으면 비자가 필요하다.’라고 대답했다. 면접관의 그 실망스러운 얼굴이라니. 지금도 내 얼굴이 화끈댄다.
결국 나는 그 면접에서 떨어졌다. 다음 일정이 담긴 엽서를 받지 못한 것이다. 면접을 끝내고 나오자마자 앞서했던 지원자들이 모여 있었지만, 나는 힘이 다 빠진 기분이라 그들과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인상 좋은 호텔 직원을 만나면 눈물까지 와락 날 것 같아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왔다.
처음의 가벼운 마음과 달리 이때의 뼈아픈 경험 덕분에 승무원에 대한 나의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이후 나름 열심히 준비해 결국 승무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나의 90년대는 한 달 스케줄에 따라 뜨고 내리는 험난한 세월이 되었다. 거의 30년 전 이야기이다. 지금도 공항에서 비행기를 보면 다시 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들지만,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기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나 때는 인천공항도 없었고, 국내선 국제선이 모두 김포에 있었으며, 유니폼도 지금과 달랐다. 정말 강산이 변해도 너무 변한 옛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김혜수가 나왔던 드라마 ‘짝’을 기억하는지, 그 드라마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내게 있었다. 가장 길었던 뉴욕 13시간 비행에서도, 제일 짧은 후쿠오카 50분 비행에서도 이야기는 넘쳤다. 그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이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