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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Sep 08. 2023

뒷담화의 쓸모

-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2

승무원이었던 언니는 비행에서 돌아오면 항상 전화기를 붙잡고 몇 시간씩 통화를 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그 모든 통화가 우리 집 마루에서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 내용은 전격 공개였다. 어느 언니, 어느 후배가 이랬다 저랬다, 하하 호호 몇 시간씩 이어지던 전화 내용은 대부분 누군가의 험담였다. 그때는 우리 언니가 좀 유별난 사람인가 싶었는데, 내가 승무원이 되고 보니 그 모든 대화가 이해됐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를 보면 뒷담화가 인간의 진화에 큰 도움을 줬다는 부분이 있다. 나는 승무원 사회를 생각하며 이 말에 열렬히 공감했다. 우리의 뒷담화는 정보의 교환이며 처세술의 마법이었으니, 승무원으로서의 진화에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내가 겪은 선배, 후배, 손님의 특징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보다 편안한 비행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서 말이다. 




오늘은 그 뒷담화의 선두 주자, J 선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기발한 승무원 괴롭히기 능력으로, 우리만 아는 무형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악명 높은 빌런이었다. 무슨 사업을 하는지 모르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국내는 물론 국제선까지 언제 어디서나 나타났고, 그만큼 쌓이고 쌓인 마일리지로 인해 초대형 VIP 손님이 되었다. 


당시 승무원 호출 버튼 소리는 갤리라고 부르는 승무원 공간에서는 크게 들리지만, 복도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른 손님들의 휴식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좌석 위쪽으로 작은 불이 반짝 들어왔는데, 이 J 선생은 그 시스템을 알고 승무원이 자기 옆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뒤통수가 보일 때쯤 호출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갤리에 누구라도 있었으면 왔겠지만, 이미 그를 지나쳐 가고 있는 뒤통수 승무원은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였을 것이다. 이때부터 J 선생은 승무원들이 언제 나타나는지 시간을 쟀다. 한두 번 재는 게 아니어서 아예 승무원별 열람표를 만들어 회사에 제출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후로 J 선생이 타면 우리는 뒷걸음질을 해야 했다. 혹시나 호출 버튼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한 번은 J 선생이 국제선을 탔다. 비행기 출입문이 중간에 있어, 1등석 손님은 위쪽으로, 이코노미 손님은 아래쪽으로 안내가 되는데, 보통 1등석 손님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탑승하기 때문에 서로 마주칠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J 선생은 이코노미석 손님들과 함께 나타났고, 입구에서 자리 안내를 위해 탑승권을 보여달라는 승무원의 안내를 가볍게 무시하며 바로 1등석으로 갔다. 1등석 손님들의 명단은 비행 전 미리 승무원들에게 배포된다. 하지만 좌석이 업그레이드되거나 공항에서 티켓을 사는 경우 등은 그 명단이 뒤늦게 올라오기도 한다. 그날 J 선생의 명단은 일등석에 없었다. 게다가 J 선생은 ‘와! 1등석이 이렇게 생겼구나! 한번 앉아볼까’ 호들갑을 떨며 다른 손님들을 불편하게 했다. 당황한 승무원들은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좌석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당연히 듣지 않았다. 결국 공항 직원을 부르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은 후, 그가 자신의 티켓을 꺼내 들었다. 그 1등석 자리는 자기 자리였다. 


J 선생의 감자 사건도 유명했다. 보통 주요리 옆에 밥이나 감자가 같이 제공되는데, 그날 트집 잡은 건 바로 감자의 크기였다. 옆 사람 거 보다 자기 감자가 작다는 것이었다. 승무원들 눈에는 크게 차이 나 보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감자를 더 드리겠다고 했지만, J 선생은 듣지 않았다. 모든 손님에게 동일한 서비스를 해야 할 항공사가 감자 크기가 뒤죽박죽 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건 지 추후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했다. 자기가 사장이다. 결국 J 선생이 타면 우리는 스테이크와 감자의 크기, 개수 등을 비교하고 조금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일이 늘어나게 만든 훌륭한 분이시다.


이렇게 J 선생의 전설적인 험담이 돌면서 몇 가지 유용한 정보도 얻게 되었다. 선생은 비행기 탑승과 함께 승무원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J 선생님, 오늘도 탑승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이 더 좋아 보이시네요. 사업은 여전히 번창하시지요?’라는 몇 가지 모범 답안도 돌아다녔다. 하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명성과 함께 모든 승무원들이 그를 알아보게 되면서, J 선생은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될 수 없게 되었다. 승무원들이 험담으로 인해 모두 진화한 것이다. 


이제 J 선생은 그 활동 범위를 넓혀 공항에서도 불쑥불쑥 승무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주로 신입 승무원들이 그의 먹잇감이었다. 대체로 신입들은 선배를 앞질러 가지 못하고 뒤꽁무니에 붙어 다니기 마련인데, 그들을 노려 갑자기 얼토당토 한 질문을 했다. 몇 기냐, 어디 비행 가냐, 기종이 뭐냐 등 발설하기 힘든 비행 정보까지 꼬치꼬치 캐물으니 신입들은 대답을 꺼렸을 테고, 그는 승무원들이 불친절했다고 컴플레인했다.  

당연히 승무원들의 불만은 컸다. 이 손님 하나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소홀히 되는 건 물론 그렇게 강조하는 안전까지 문제 될 수 있다는 보고서들을 제출하기 시작했다. 우리만 그런 불만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예약부나 공항 지상직원들도 J 선생의 온갖 사소한 불만 제기에 지쳐, 이런 손님들은 탑승 거부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여론까지 일었다. 


하지만 회사의 입장은 단호했다. 이 손님이 지출하는 티켓 값이 연 1억을 넘는데, 이렇게 중요한 충성 고객을 버릴 수는 없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결말이다. 결국 회사가 제안한 타협안은 J 선생이 제기하는 불만에 대해서는 인사상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장문의 육하원칙 보고서는 제출해야 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일들은 모두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비행 후 밤새도록 전화기를 붙잡고 토해 냈던 동기들의 J 선생 대처 이야기들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이름만 알고 있던 J 선생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뒷담화의 쓸모란 이런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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