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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Sep 14. 2023

꼰대의 사도

-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3

승무원이라고 하면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은 이것이다.


 ‘국내선이냐, 국제선이냐?’


 아마도 국내선, 국제선 승무원이 따로 있으며, 국제선을 타는 승무원이 더 높은 직급이라고 생각들 하는 것 같다. 나이 지긋하신 손님 중에는 ‘그러게 열심히 공부해서 국제선 타지.’라며 측은하게 보는 분들도 있었다.  


 보통 스케줄은 국내와 국제가 섞여서 짜여진다. 국제선이 길게 한 번 하고 하루 이틀 쉬니까 더 좋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만큼 체력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미주나 유럽 쪽 긴 노선이 두 번 정도 있고, 그 틈새를 아시아 쪽 짧은 국제선과 국내선 비행으로 채우게 된다.


사실 국내선이라고 하루에 한 번 제주 왕복, 이것만 하는 건 아니다. 제주 찍고 부산 찍고, 광주 찍고, 이런 식으로 여러 개의 노선을 하루에 다 하게 된다.(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제주 뻥, 부산 뻥, 광주 뻥) 손님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지만 승무원들은 그 비행기를 타고 다른 도시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깜빡 정신을 안 차리면 기내 방송 중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제주로 간다고 해야 할걸 부산이라고 말하거나 비행기 편수를 틀리게 말하는 건 양반이다. 나는 기장님 이름을 틀리게 방송했다가 한 소리 듣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의 주니어 생활을 거친 후 드디어 국내선 매니저가 되었다.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매니저는 할 일 없이 왔다 갔다 하며 잔소리와 지적질만 해대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신경 쓸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브리핑 때마다 소화기 위치, 사용법 등을 묻는 선배들이 그렇게 미웠는데, 유사시 비상 장비의 위치를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게 아직 신참 매니저로서 바짝 긴장하며 국내선 뺑뺑이를 돌던 어느 날, 드디어 악명 높은 J 선생을 맞게 되었다. 


보통 손님이 내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이 채 안 된다. 그 시간 동안 두고 내린 물건은 없는지, 안전 장비들은 이상이 없는지 체크하는 건 물론, 에너지 충전을 위한 도시락도 까먹어야 했다. 하지만 그날의 지상직원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J 선생이 갑자기 떴으며 이미 공항 카운터를 초토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비행기에 먼저 타겠다고 게이트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도 했다. 우리는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재빨리 탈취제를 뿌리며 J 선생에 대한 정보를 취합했다. ‘이름을 꼭 불러드려야 한다. 스포츠 신문을 미리 빼놨다가 드리는 게 좋겠다. 승무원 호출 버튼 조심하자.’ 등등 정보를 나누며 급하게 준비를 마쳤다. 


명색이 매니저인 나는 천근만근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끌고 게이트 쪽으로 나섰다. 비행기 문 앞에서 인사해도 되지만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버선발로 뛰어나가는 연기를 펼쳐 보인 것이다.


‘선생님. 오늘 탑승해 주신다고 해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매니저 된 지 얼마 안 돼서 부족한 게 많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주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는 J 선생과 함께 브리지를 걸어 들어오며 비행기 좌석까지 안내해 드린 건 물론, 그날의 승무원들도 일일이 소개했다. 선생의 안색을 살피니 기분이 많이 좋아 보여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기분 좋아 보이는 것은 우리의 남다른 친절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모든 국내선에서 제주 항공권 증정 이벤트가 있었는데, 직원들보다 회사 소식을 잘 아는 J 선생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타자마자 그 티켓을 요청했고 우리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맘대로 드리자니 꺼림칙했고, 그렇다고 못 준다 버티면 그 후폭풍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티켓을 J 선생에게 공식적으로 증정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회사에서 지정한 증정 방법이 따로 있지는 않았지만, 이런 이벤트를 진행 중이라는 방송은 꼭 해야 했기 때문에, 무턱대고 바로 드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손님 중 한 분의 종이컵 밑에 스티커를 붙여 두었으며, 그분에게 제주 항공권을 드리겠다는 이벤트 방송을 했다. 물론 그 스티커는 J 선생의 컵 밑에 있었다. J 선생은 아주 기뻐하며 그 티켓을 가져갔고, 나는 절차대로 선물 수령 고객 명단을 회사에 보고했다. 


하지만 무사히 문제를 해결했다고 안도하던 것도 잠시, 후배 하나가 삐딱하게 나왔다. J 선생이 선물에 당첨되도록 조작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컴플레인이 두려워 꼼수를 쓴 내가 비겁하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J 선생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가 괜한 정의를 내세우며 싸울 필요가 뭐가 있냐, 이미 수억을 회사에 쏟아붓고 있는 VIP 고객인데 국내선 왕복 항공권 한 장 정도는 드려도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로 후배를 설득해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랑 몇 기수 차이도 나지 않던 그 후배는 정의의 사도인 양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구시렁대었다. 화가 난 나는 다른 후배들을 갤리에서 내보내고 매니저인 내가 처리한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옳지 않다는 권위주의를 내세워 그 입을 막아 버렸다. 


'네가 정의의 사도라면 나는 꼰대의 사도다.' 


속으로 부글부글 되뇌면서 말이다. 


그렇게 J 선생과의 인연이 끝이면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후 미주 노선에서 그를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또 한 번의 아슬아슬한 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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