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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Sep 20. 2023

복수의 꿈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4

승무원을 하다 보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든 표시하려고 하는 손님들이 계시다. 단체 해외여행을 처음 가시던 할머니들은 식사를 끝내더니 팔을 걷어붙이시며 말씀하셨다.


‘자, 설거지는 우리가 할게.’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 미리 얘기하자면, 기내에서 설거지는 안 해도 된다. 그대로 카트에 넣어두면 도착지에서 케이터링이 처리하는 것이다. 무슨 협회 단체장들이 돈봉투를 주기도 했다. 이것도 미리 얘기하자면, 승무원들은 팁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승무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답례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칭송 편지였다. 지금은 항공사 SNS 가 있어 인터넷에 바로 글을 올릴 수 있지만, 당시는 편지지나 엽서에 손님이 자필로 쓴 편지가 가장 큰 선물이었고, 이걸 회사에 제출하면 인사고과에도 반영되었다.


몇몇 똑똑한 승무원들은 손님들에게 칭송편지를 써 달라고 대놓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승무원 본인이 먼저 엽서를 써주고 답장을 유도하기도 했다. 어쨌든 손님들의 진심 어린 칭찬과 편지만큼 승무원들을 기쁘게 하는 건 없었던 것 같다.


반대로 승무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불만 편지, 일명 컴플레인 레터였다. 이런 편지를 받으면 우리는 육하원칙에 따른 경위서를 써야 했고, 그 사안이 심각하면 재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다. 어떤 선배는 손님의 모욕적인 발언에 발끈했다가, 한 동안 비행 정지를 당한 적도 있었다.


승무원 멋있어 보여서 내 딸도 시키려고 했는데, 와서 보니 무슨 식모와 다를 바 없네.’라는 승객의 말에 ‘아줌마 닮았으면 하고 싶어도 못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감정 노동자니 갑질이니 하는 용어조차 없었기 때문에, 승객들의 무례한 언행과 무리한 요구는 정말 많았지만 당시는 참고 견뎌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선배가 저렇게 대답했다니 모두들 놀랐고 내심으로는 통쾌했다.




이제 다시 컴플레인의 끝판 왕인 J 선생 이야기로 돌아간다. 국내선 항공권 이벤트가 있고 몇 주 지나지 않아 나는 그를 미국 LA 노선에서 다시 만났다. J 선생은 타자마자 모든 승무원들 앞에서 나에게 갚을 것이 있다며 밥을 사겠다고 했다. 모두들 J 선생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라 깜짝 놀랐다. 자기가 무슨 회사 임원인 양 회식에 참석하라는 통고 같이 들리기도 했다. 당연히 선배들은 모두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물었지만, 나는 제주 왕복 티켓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 손님들의 무리한 요구는 무시해야 한다며 정의를 내세웠던 나라서 그날의 비겁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냥 ‘항공권 이벤트에 당첨되셨는데 그게 좋으셨나 봐요.’라고 대답했다.


어쨌든 그날의 승무원 모두 J 선생에게 밥 한 끼 정도는 받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동안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모두들 한 두 개씩은 묻어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선배들은 내친김에 J 선생에게 제대로 받아내야겠다며 다른 승무원들까지 부르자고 했다. LA는 하루 몇 편씩 비행기가 뜨기 때문에 현지 호텔에도 두 세 팀이 항상 있었는데, 그들까지 모두 초대하자는 것이었다.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30여 명의 승무원이 한인 고깃집에 모였다. 우리 팀 10여 명에 다른 팀까지 합석한 것이었다. 역시나 다른 팀 승무원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이젠 나도 좀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국내선 항공권 덕에 J 선생은 30여 명의 승무원들에게 고기를 사야 할 판이었다. 표정을 별로 숨기지 않는 J 선생이기에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이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기획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어 안절부절못했지만, 그냥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아 이 불편한 모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J 선생의 테이블에는 남승무원들이 둘러앉아 술도 좀 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그는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회사 임원 누구누구와 친하다는 둥, 본인은 우리 비행기만 탄다는 둥 원하지 않는 충성심까지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제발 다른 항공사 좀 이용하세요.’ 모두들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긴 인사를 끝으로 J 선생은 호기롭게 지갑을 꺼냈다. 하지만 그가 꺼낸 것은 신용카드가 아닌 현금이었다. 그는 우리 팀 승무원 1인당 얼마라며 스스로 계산한 금액만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른 팀들은 알아서 하라더니 유유히 식당을 나가 버렸다. 그날 남겨진 모든 승무원들의 황당한 표정은 상상이 갈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나머지 돈을 나눠 내는 수밖에 없었다. 왠지 얻어먹고도 당한 듯한 느낌. 역시 J 선생은 만만치 않았다.


감히 갑질왕에 복수를 꿈꾸다니, 우리의 소심한 꿈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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