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미젤리 Oct 07. 2023

귀신이 아닙니다

-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5

승무원을 하면 교육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처음 3개월 동안의 강도 높은 신입 교육 후에도, 국제선 교육, 안전 교육, 새 노선 취항 교육, 새 항공기 도입 교육 등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교육이 이어졌다.




서울의 한적한 곳에 있던 교육장은 버스를 내리고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시골길이었다. 처음 신입 교육을 받던 겨울은 정말 추웠지만, 우리는 정해진 복장 규정에 따라 치마 정장과 구두를 꼭 신어야 했다. 출퇴근도 마찬가지여서 춥다고 부츠를 신거나 코트대신 패딩 파카를 입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교육 기간 내내 잔인한 벌점이 차곡차곡 쌓여갔던 것이다.


늦으면 당연히 벌점, 교육 중 졸아도 벌점, 테스트 점수가 낮아도 벌점이 내려졌다. 립스틱과 매니큐어는 새빨간 색이어야 했고, 마스카라를 안 해도 벌점, 머리카락이 삐져나와도 벌점, 동기들과 서로 존댓말을 하지 않아도 벌점, 안 웃어도 벌점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무슨 감옥에 있다 왔나 싶을 정도로 규율은 세세했고, 벌점은 가차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집에서 교육장까지 셔틀버스가 있었다. 그 새벽, 완벽한 화장에 당시 유행하던 짧은 치마까지 입고 있던 나는 눈에 많이 띄었을 것이다. 다행히 나 말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는 동기가 한 명 있어서 그 시선은 분산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3개월 간 그 추운 새벽의 버스를 기다렸고, 단 한 번의 지각, 결석도 없이 무사히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날이 다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 피곤했는지 드디어 늦잠을 자고 말았다. 준비를 마치고 나가도 버스는 이미 놓칠 시간이었다. 헐레벌떡 대강 준비하고 나와 택시를 탔다. 빨간색 롱코트에 머리는 묶지 못해 산발, 눈 화장만 대충 하고 립스틱을 생략한 입술은 창백했다. 바깥은 한 겨울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바로 택시를 잡을 수 있었고, 이대로라면 통근 버스보다 회사에 먼저 도착할 것 같았다. 나는 눈뜨자마자 시작된 화들짝 기운을 가라앉히고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택시 기사님이 행선지를 물었다. 나는 공항 근처 조금은 낯선 동네 이름을 이야기했지만 거기가 어딘지 모르는 눈치였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나는 일단 공항 근처로 가 달라고 이야기했다. 젊은 여자 혼자 택시를 타는 것 자체가 두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뒷자리에 꼿꼿이 앉아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행선지에 가까워지고, 자세한 길 안내를 위해 ‘우회전해주세요. 직진입니다.’라며 차분히 말했다. 그때였다.


‘도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지 화들짝 놀라 기사님을 바라보니, 내가 무슨 처녀 귀신이라 생각하는 듯 바들바들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교육장이 워낙 깊고 깊은 한적한 논밭 가운데 있었던 터라 우리들도 개그 프로그램의 ‘귀곡산장’을 본 따, 그곳을 00 산장이라고 부르던 차였다. 머리는 길고 입술은 창백한 젊은 여자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니 오해하기 딱 좋았을 것이다.




회사에 출근해 동기들에게 이야기하니 다들 웃고 난리가 났다. 대게 젊은 여자 혼자 택시를 타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오히려 택시 운전사가 무서워하는 귀신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전 귀신이 아닙니다.





작가의 이전글 잠시,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