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6
길고 긴 3개월의 힘든 신입 교육을 마치고, 우리는 정식 승무원이 되었다. 그동안은 교육원 내에서 동기끼리만 있다 보니 선배들의 매운맛을 몰랐다면, 이제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며 갖가지 소문이 돌았다. 기내 방송용 마이크로 머리를 때렸다는 둥, 쪽머리용 리본이 예쁘다며 뺏었다는 둥, 소위 선후배의 위계질서를 운운하며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런 게 ‘직장 내 괴롭힘’ 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우리가 잘못해서, 내가 좀 모자라서 이런 일들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나의 첫 국제선 일정은 천사의 도시 LA였다. 사실 난 승무원이 되기 전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해외여행이니 어학연수니 하는 것도 내가 졸업한 이후에나 유행하기 시작했지, 제주도 갈 때나 한 번 타볼까 말까 한 게 비행기였다. 교육 중 국내선은 몇 번 타봤지만 멀고 먼 미국이라니, 가기도 전 마음이 설레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 비행의 제일 선임 매니저가 악명 높은 A였던 것이다.
보통 모든 승무원들은 자기가 맡은 구역을 책임지고 서비스하게 되어 있는데, 사무장 또는 매니저는 전체적인 관리를 맡았다. 일에 열정이 있는 매니저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여기저기에 일손을 보태곤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 구석에 숨어서 있는지 없는지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한 번쯤 지나가며 어김없이 우리의 잘못을 호되게 지적했고, 다소 인신공격적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았으며, 모든 서비스가 끝나면 손님들보다 더 멋지게 식사를 차려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결혼한 여승무원들은 일을 그만두는 게 관례였다. 그러다 보니 높은 기수로 남아 있는 사무장들은 대게 남승무원들이었다. 게다가 남승무원들은 군대 가산점 때문에 입사 동기라도 남자가 월급도 많고 승진도 빨랐으며 기내에서도 다소 쉬운 기내 면세품 판매 업무만 맡았다. 승무원 사회는 소수의 남자가 다수의 여자들 위에 군림하는 이상한 형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깨달은 것도 어쨌든 한참 후의 일이었고, 그날 그 첫 비행에서 나는 그냥 열의만 넘치는 바보 신입 승무원이었다. 선배들은 자기들이 맡은 일 하기도 벅차 있었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내가 무척 거슬렸을 것이다. 교육실에서 배웠던 우아한 서비스들은 그야말로 교과서 속 글일 뿐이었다. 손님들의 요청 사항을 다 소화도 못 하고 있는데, 다음 서비스를 준비하고 정리할 주변머리가 내게는 없었다. 선배들에게 한 소리 듣지 않으려면 뭔가 노력하는 모습은 더 보여야 할 테니 몸만 더 피곤해졌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치수 크게 받은 기내용 신발이 꽉 낄 정도로 발만 퉁퉁 부어갔다.
그렇게 정신없는 가운데 첫 번째 식사 서비스가 끝난 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반성하며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매니저 A가 갤리 커튼을 젖히고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이유라도 알려주면 모르지만 그냥 잠자코 째려보기만 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이미 나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아무 말없이 저러고 있는 매니저가 이해가 안 됐다. 참다못해 물었다.
‘왜요?’
신입의 용기였을까? 나중에 내가 그렇게 말했다니 동기들은 다들 경악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라던가, ‘매니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친절히 말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아직 진정한 승무원의 태도를 갖지 못한 뻣뻣한 신입이라고 욕먹을 일이었다고 했다. 어쨌든 그 말을 들은 매니저는 정말 깜짝 놀랐다. 아마도 지금 여기서 이러고 쉬고 있는 거냐고 한 소리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당당하게 눈을 치켜뜨는 내 앞에서 할 말을 잃었던 것 같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얼마간 더 째려보더니 그냥 나가 버렸다.
그 후로 나의 비행 생활은 편치 않았다. 건방지다는 꼬리표가 붙었고, A 선배가 두 손 들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왜요?’ 한 마디의 위력이 그랬다. 물론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시작은 그 한마디였다. 걱정하는 얼굴로 소문이 어쩌고 하면서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짜고짜 괴롭히고 억지 부리는 선배도 많았다.
우리에겐 손님들 블랙리스트만 있던 게 아니라, 승무원, 기장 블랙리스트도 있었다. 나는 매번 비행 승무원 명단을 확인하며 한숨부터 쉬는 날이 많았다. 공항 게이트 앞에서 창 밖의 비행기를 보면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탑승하기 싫은 내 영혼이 저만치서 바닥에 달라붙어 뭉그적 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신참 승무원의 어려움에 좌절하던 것도 잠시, 좋은 경기를 틈타 몇 달에 한 번씩 신입 후배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단 1,2년 만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후배들이 생기며 나도 같이 변해가게 되었다. 그전의 설움을 되갚기라도 하듯, 나는 토 달지 않고 깔끔하게 일하는 후배들이 예뻤고, 빈 말이라도 나에게 아부를 좀 떨어주는 후배가 기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일 잘하고 싹싹한 후배들을 보며 나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역시 승무원은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그만둬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렇게 주어진 스케줄에 치여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갑자기, IMF 한파가 몰아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