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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Nov 16. 2023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 90년대 승무원 이야기 7

1997년 11월 말, 금융 위기라는 사건이 나 같은 일개 회사원에게까지 미쳤다.


불과 며칠 사이에 승객은 아예 볼 수가 없었고, 빡빡하게 짜여 있던 내 비행 스케줄도 거의 취소되었다. 손님도 없는 빈 비행기를 띄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장 12월 말 예정된 상여금도 나오지 않았다. 말로만 상여금이지 사실 2달에 한번 지급되던 월급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곧이어 회사가 정리해고 명단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회사를 다니고 말고는 나의 의지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원하면 언제든 사표를 집어던지고 훌훌 떠날 수 있을 것 같았고, 문 밖에는 또 다른 기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정리 해고 소문에 모두들 그동안의 회사 생활을 주르륵 흩었고, 나 또한 내 근태를 되돌아보았다.


그렇게 IMF 구제금융 선언이 있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회사는 20여 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A는 무슨 일 때문에 걸린 것 같다는 둥, B는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둥, 명단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름의 죄명을 새기고 있었다. 모두들 정리해고 같은 걸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회사는 대 놓고 ‘정리 해고’라고 써 붙이는 게 아니라 있지도 않은 부서로 ‘발령’을 낸다고 공지했다. 뭐 하는 부서인지 소문이 무성했지만, 결국 발령은 그냥 이름일 뿐, 명단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사표를 쓰라는 압박이 있었다고 들었다. 다소 버텨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퇴사하고 말았다.


정리 해고당한 사람들을 측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이 남아있는 전 직원이 돌아가며 무급휴직을 하게 되었다. 동기 중 사 번이 좀 빠른 편인 나는 당장 다음 달부터 한 달간 휴직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휴가 한번 맘 놓고 쓰지도 못한다고 불평했을 때가 어제 같은데, 갑작스레 예정에 없던 긴 휴가를 갖게 된 것이다. 게다가 과연 한 달 뒤 복직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집에 있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당시 금리와 달러는 거의 미친 수준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달러 당 800원 대였던 환율이 2000원에 육박했다. 승무원들의 해외 체류 출장비가 달러에서 원화로 지급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약 100 불 정도로 달러를 줬다면 이제 예전 환율로 계산된 8만 원을 지급했다. 우리는 원화를 직접 환전해야 했고, 수수료까지 더하면 예전의 반도 안 되는 돈이 쥐어졌다. 당연하게도 이걸로는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조차 부족했지만 아무도 불평할 수 없었다. 회사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 직원들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온 나라가 망해가는 지금, 잘리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한 달을 쉬고 회사에 돌아와 다음 차례들이 휴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가며 하는 것이 비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신입 2개 기수의 후배들에 대해 6개월 휴직을 결정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신입 승무원들의 불만이 컸지만 우리는 모두 조용히 할 수밖에 없었다. 신입 후배들은 다시 우리 회사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선배들 때문에 자신들이 희생당한다고 억울해했고, 그 불만을 표출하며 선후배 규율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승무원 사회는 규율이 엄격했다. 비상 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명령체계가 명확해야 한다는 구실로 선후배 사이 질서는 군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나도 입사 초기에는 그 쓸데없는 엄격함에 비분강개했던 적이 많았지만 차츰 그 질서에 적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국가적 금융 위기를 계기로 우리 회사의 위계질서는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후배들은 선배에게 인사를 안 하는 건 물론, 정해진 업무도 태만하기 일쑤였고, 비행 근무 중 손님 의자에 떡하니 앉아 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은 막내 기수 한 명과 마지막 비행을 같이 하게 되었다. 비용 절감으로 호텔도 같은 방을 써야 했는데, 이 후배는 작정을 했는지 밤새도록 TV를 껐다 켰다, 볼륨을 높였다 줄였다, 변덕을 부리더니 갑자기 불까지 환하게 키며 잠을 방해했다. 나는 원래 후배들에게 잔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던 소심쟁이라 뭐라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모두가 삶에 대한 자신감을 급격히 잃어 갔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통은 컸고, 산업구조 개편이라는 이름의 불평등도 생겼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하기엔 다들 나부터 살고 보자는 생각이 더 컸다.




나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의 불안정성을 깨닫고 난 후, 적극적으로 이직을 알아보았다. 당시 결혼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는 분위기였고, 출산 휴가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을뿐더러 육아 휴직이라는 건 들어 보지도 못하던 때였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상태에서 무턱대고 승무원을 그만두었고 다행히 3개월 후 다른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분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다소 비장한 느낌이 들지만, IMF 이후 몇 년 간 내 마음은 그랬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생각해 보니 주변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살아남은 세상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금융위기를 일으킨 건 내가 아닌데 왜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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