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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Oct 18. 2023

목표는 입선

어느 날, 글쓰기 선생님이 링크를 하나 보내주셨다.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그동안 항상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 이런 걸 보내 주시다니, 이렇게 인정해 주시는 건가 착각하며 덜컥 접수까지 해 버렸다. 뒤늦게 알아보니 백일장은 아침 일찍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행사였다. 게다가 컴퓨터가 아닌 원고지에 자필로 써야 하는 아날로그 대회기도 했다. 원고지라니, 고등학교 이후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동네방네 소문부터 내고 보는 나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내 출전 소식을 이미 크게 알렸다. 이제 물러날 수 없는 한판 승부만 남았다.


그렇게 화창한 가을의 어느 날, 나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으로 향했다. 아침 수영장까지 들렸다 헐레벌떡 뛰어간 행사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이미 개막도 선포되었고, 한창 백일장의 주제어를 추첨하고 있었다.


‘어머님’, ‘새벽’, ‘삼겹살, ‘서랍‘


쉽지 않지만, 흔한 주제이기도 했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고민하며 전에 써 둔 글들을 몇 개 떠 올려보았다. 얼마 전 엄마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 그걸 좀 늘리고 다듬어 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짐을 챙겨 근처 스터디 카페로 향했다.

 

어느 제약사의 후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접수와 동시에 샌드위치에 음료수, 연필, 원고지, 수첩을 손에 쥐어 주더니 스터디 카페 이용도 무료라고 했다. 나는 마로니에 공원 돌바닥에 앉아서 써야 하나 걱정하며 방석까지 준비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길바닥보다는 편안한 스터디카페가 당연히 더 낫다. 나는 다른 여러 참가자들과 함께 우르르 스터디카페에 올라가 순식간에 한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3시간 반,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약간의 수정만 하려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아침도 못 먹고 분주히 나온 터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속담인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샌드위치와 커피부터 마셨다.


이제야 마음을 다잡고 노트북을 켜 생각해 둔 글을 꺼냈다. 이런. 생각했던 것보다 분량이 많이 짧다. 정해진 길이는 원고지 15~20매 내외인데 A4 용지 한 장 정도의 글이니 두 배는 늘려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에피소드 하나를 더 첨가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찌어찌 분량을 맞춰놓고 보니 다소 신파적인 것 같아 진실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고 맞춤법 교정도 하다 보니 시간이 30분도 안 남았다. 화들짝 놀라 얼른 원고지에 글을 옮겼다. 오랜만에 써 보는 연필 잡이라 생각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다. 손가락도 아프고, 자꾸 오자가 나니 지우고 다시 쓰느라 책상 위 지우개 가루가 한가득이다.    


그렇게 휘갈겨 쓴 원고지를 들고 접수장에 뛰어가 겨우겨우 제출했다. 아직 제대로 돌봐 주지도 못한 아이를 떠나보내는 듯 원고지 끝을 놓고 싶지 않지만, 들고 있어 봐야 수정도 어렵고, 할 만큼 했다 생각에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지금 시간이 오후 2시, 심사 결과 발표는 5시부터이다. 첫 술에 배부를 리 없다고, 그냥 좋은 경험이었다 생각하자고 나를 위로했다.


파랗게 쨍한 하늘, 구름 조각까지 멋져 보이는 가을날, 오랜만에 대학로를 거닐었다. 유튜브를 찍는지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소란함도 있고, 데이트를 하는 예쁜 커플들도 한 가득이다. 오전의 분주함을 벗고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멍하게 나를 방전도 시켰다. 오늘은 혼자여서 더 좋다. 짧지만 집중해서 글을 썼던 순간도 즐거웠고, 그냥 상을 받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게 설레었다.




드디어 대망의 수상식. 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인지, 가슴이 벌렁벌렁 댄다. 앞서 있던 공연으로 이미 무대 앞은 사람들로 꽉 차 있고, 나는 뒤쪽에 어정쩡하니 서 있었다. 그 와중에 내 이름이 불릴 경우를 대비해 무대까지 뛰어가는 동선까지 짜 두었다. 거창한 수상 소감까지는 아니지만 대충 몇 가지 키워드도 준비하고 말이다.


수상은 특별상, 입선, 장려상, 우수상, 장원까지였다. ‘그래. 입선 한 번 노려보자.’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느끼며 수상자 명단을 기다렸지만, 나는 없다. ‘틀렸구나.’ 생각하던 그때 참가 접수를 받던 부스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는 게 보인다. 아마도 행사 후 기념품을 수령하기 위해 줄을 서는 것 같았다. 수상 무대의 떠들썩함이 내 뒤통수를 잡았지만, 애써 외면하고 기념품 줄에 섰다. 그리고 바로 내 뒤에 서려는 분이 묻는다.


‘기념품 줄이지요?’

‘네. 일찌감치 포기하고, 선물이나 받아 가려고요. 젯밥이 최고지요.’


모르는 분이었지만, 서로 쳐다보며 하하하 웃었다. 역시나 수상은 못했고, 푸짐한 선물은 받았다.




집에 돌아와 선물을 펼쳐 사진을 찍어 올렸더니, 친구들이 상을 받은 줄 착각한다. 참가상이라고 농담하며, 오늘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내년에도 또 나갈 생각이라고, 그때는 같이 가자고 했다. 이렇게 좋은 행사가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년에는 소풍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가보자.


입선의 그날까지, 도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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