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캉스 2
한참 자다 깨다 했는데 아침 9시 반이다. 원래 예정 도착 시간은 10시 넘어였지만 금요일 새벽 교통 체증도 없으니 30분이나 일찍 정선에 도착했다. 우르르 같이 내린 사람들과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며 ‘4050 북캉스’ 사인이 번쩍이는 또 다른 버스에 올랐다. 무슨 산악회 단체 관광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작부터 피식 웃음이 났다. 등산할 때 배낭을 각자 매고 온 커플은 불륜이라던데, 오늘 남편과 각각의 가방을 챙겨 왔으니 남들이 오해할지도 모르겠다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첫 번째 일정은 정선의 ‘로미지안 가든’에서 열리는 힐링 명상 요가였다. 천식에 걸린 부인을 위해 조성했다는 로미지안 가든은 가을을 넘치도록 느낄 수 있는 광활한 정원이었다. 그 정원 속 작은 건물에 각자의 요가 매트를 깔고 누웠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통창 밖으로는 대나무 숲이 한가득이고, 명상을 위해 틀어 놓은 조용한 음악으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요가 강사님의 조용한 목소리에 따라 그리 어렵지 않은 명상 요가 동작을 따라 했다. 매트에 등을 대고 누워 여러 높낮이로 울리는 종소리를 듣다 보니 새벽의 분주함이 잊히며 스르르 잠도 온다. 혹시라도 옆에 있는 남편이 평소처럼 코라도 골까 슬쩍 돌아봤지만 다행히 눈이 초롱초롱하다. 몸을 이완시키고 정신을 풀어놓고, 가을바람에 살랑대는 이파리들의 우수수 소리에 집중해 본다. 자연 속에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하며 눈을 떴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독서 시간을 가졌다. 선영 책방 강사님을 따라 ‘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책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 작가의 책으로, 현대인의 여러 감정적 문제에 대한 자기 치유, 돌봄에 관한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읽은 ‘피로 사회’에서 타인과 단절된 자의식이 너무 과해서 우울증이나 번아웃 등이 많아진다는 내용을 읽고 깊게 공감한 바 있었다. ‘할 수 있다.’라는 자기 긍정에 떠밀려 ‘해야만 한다.’는 압박으로 살아 온건 아닌지 반성하면서,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마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소통의 한 방법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욕망을 비워내는 독서 토론을 마치고, 로미지안 가든을 한 바퀴 산책했다. 잘 정돈된 가운데 정원이 아니라 가장자리 쪽 숲길을 걷자니 곧게 뻗은 자작나무들이 우리에게 길을 터 준다. 남편과 셀카도 찍고 이야기도 나누며 한 시간 넘게 천천히 걸었다. 날씨도 맑고, 가을 하늘은 공활하고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좋은 날이다.
책 이야기를 하고 같이 산책을 하며 자연스레 참석자들의 면면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독서 동아리를 하는 열혈 독서광이었고, 힐링 관련 강연을 하시는 분도 있었으며, 사진을 찍으시는 분, 바닷가 환경 정화 봉사를 하시는 분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처럼 부부동반으로 온 팀도 3팀이었고, 친구나 직장 동료, 아이와 함께인 분들도 있었지만 혼자 온 분들도 많았다. 남편은 계속해서 자기가 따라와 준 거에 대해 고마워하라고 생색을 냈다. 아무래도 혼자 오신 분들이 조금 서먹해 보였는데, 자기가 안 왔으면 나도 말 한마디 못 했을 거라는 논리였다. 오히려 남편 챙기느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할 시간이 없었던 거 같은데, 생색이 천성인 남편이 그렇다니 맞춰 줄 수밖에.
저녁을 먹고 하이원 리조트로 향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별밤 산책이 남았다. 강원도 산골이니 서울보다 훨씬 많은 별이 보이겠거니 기대가 컸지만, 오늘 새벽 강아지와 함께 했던 서울 하늘보다 덜 보였다. 아마도 산책길을 따라 조명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다 보니 그 불빛에 별빛이 사그라들었나 보다. 아이가 어릴 때 천문대 좀 다녀 본 나와 남편은 별자리를 척척 맞추며 추억을 되새겼다. 한 시간 정도 산책 겸 별자리를 돌아보고, 그대로 잠들긴 아쉬워 호텔 주변을 한 바퀴 더 돌았다. 내친김에 강원랜드에서 돈이라도 좀 따 볼까 하는 헛된 생각도 잠시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신분증이 없어서 안에 들어가진 못했다. 선입견 일수도 있지만 카지노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그렇게 착실해 보이지 않아 굳이 같이 섞여 들어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방에 돌아온 우리는 로봇이 배달해 준다는 룸서비스 광고에 끌려, 강원도산 맥주를 주문해 꿀처럼 마셨다. 술이라면 질색하는 딸이 갑자기 영상 통화를 걸어와 후다닥 안 마신 척 연기를 해야 했지만, 역시 하루의 피로를 푸는 건 맥주 한 잔의 여유인 것 같다. 일찍 집에 온 딸이 강아지도 잘 챙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 안심하고 돌아다녀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길고 긴 꽉 찬 일정을 마치고 푹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은 곤돌라를 타고 산 정상에 오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