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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Jan 27. 2024

정체성 (밀란 쿤데라)

- 독서 모임 1

 이야기 구조로만 봤을 때는 참 가벼운 책인데, 제목은 무게감 있는 ‘정체성’입니다. 게다가 강신주의 겉핥기식 해석을 먼저 접해버리고 나니 (강신주의 감정수업), ‘정체성’과 ‘자긍심’을 연결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연하의 남자친구가 늙어가는 연인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익명의 사랑 편지를 보내고, 여기에 고무되는 여자를 관찰하는 스토킹 이야기인가 싶은데, 결말로 갈수록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여주인공 샹탈은 남자친구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사랑에 목마른 늙은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샹탈은 한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그 아이를 잃은 후엔 다른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하는 바로 그 한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그런 그녀의 감춰진 정체성을 모른 채, 연하의 남자친구 장마르크는 그녀의 자긍심을 높여주기 위해 괜한 짓을 한 것입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말처럼 장마르크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태도를 샹탈에게도 적용시켜 보았고 버림받을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었습니다.


 장마르크에게 샹탈은 그들이 처음 만난 순간 이후로만 존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샹탈 또한 이러한 거부의 극단주의에 동조했다.’고 소설은 서술합니다.

그런 샹탈이 장마르크를 떠났습니다. 장마르크가 자신을 속이며 편지를 보냈고, 그 숨겨둔 편지를 멋대로 뒤졌다는 것에도 화가 났습니다. 엎친데 덮친다고, 전남편의 시누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해 집을 난장판을 만들었습니다. 한 아이 엄마로서의 샹탈을 인정하지 않았던 시댁 식구들은 그녀에게 다른 아이를 낳으면 잊힐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위로를 했었지요. 그들이 그녀의 집에 침범한 것입니다. 그렇게 참을 수 없게 된 샹탈은 장마르크를 떠납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런던으로 향하고, 우연히 기차역에서 만난 동료의 논쟁을 통해 목적 없이 사는 삶의 가벼움을 목격하기도 하고요. 그들을 보며 '사상의 잡거성'이란 말도 떠올립니다. 사전에도 없는 단어 ‘잡거성’. 번역가가 이 단어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다른 대체어가 없었는지, 아니면 각주로라도 부가 설명을 해 줄 수는 없었는지요. 한자에 한없이 약한 저는 샹탈의 깨달음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모든 사상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기에 모든 확언과 태도 표명은 같은 가치를 지니며 서로 비벼대고, 겹치고, 애무하고, 한 몸이 되고, 쓰다듬고, 만지작거리고 교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든 것이 서로 다른 인물이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이 ‘잡거성’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걸까요. 어쨌든 요상한 대화를 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사라진 샹탈은 이상한 꿈을 꿉니다. 지렁이와 뱀이 나오고, 침을 흘리는 여인이 나오더니 건물 안에 갇히기까지 합니다. 꿈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샹탈,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원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의 꽃이 떠오릅니다.


 대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지만, 한 아이의 엄마이고 싶었던 샹탈, 모르는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게 아니라 장마르크의 연인이고 싶었던 샹탈은 이제 장마르크를 바라봅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 꿈에서 깨웠으니까요. 이제 샹탈은 눈꺼풀을 깜빡하는 그 사이까지 아까워할 정도로 그 만을 바라보기로 하고 그렇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장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나’가 등장하고 그 작가에게 빙의된 저 같은 독자 모두가 샹탈의 선언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샹탈의 정체성이라는 나무가 한 아이의 엄마라는 가지 옆에 장마르크의 연인이라는 잔가지 하나를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책을 통해 질문해 봅니다.


1.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2.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동료들의 대화 중 를르와의 질문)

3. 삶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는가? (를르와의 세속적 세계관에 반문하는 동료의 질문)


굉장히 무거운 질문이지요? 그렇다면 좀 더 가볍게 나가봅시다.


1. 현재의 성인지감수성으로 보았을 때 이 책에서 문제 되는 장면은 무엇인가?

2. 샹탈처럼 익명의 사랑의 고백을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3. 등장인물들의 행동 중 이해되는 점과 이해되지 않는 점에 대해 이유를 생각해 보자. (샹탈, 장마르크, 친구 F, 시누이, 를르와)



오늘의 독서 모임으로 어려운 책을 같이 해석해 나가는 즐거움을 발견하고, 나의 정체성을 알아 보는 방법도 배웠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개인적 서사와 엮어, 체코인이면서도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어로 글을 썼던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고요.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독서 모임을 통해 거장의 책을 넘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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