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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Jan 29. 2024

독서 모임 중독자

- 독서 모임 2

 20여 년의 출퇴근 회사원이 갑자기 백수가 되었다. 무엇보다 난감한 것은 오랜 시간 몸에 밴 생활 모드를 하루아침에 바꿔야 하는 것이었다. 나의 모든 일상을 재정비해야 했다.


 우선 새벽 6시 수영을 오전 9시로 옮겼다. 더 이상 출근 전 급하게 수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9시 부는 본격 주부 반이었고, 나는 첫날부터 아줌마들의 텃세에 크게 데었다. 쉽지 않은 백수 생활이구나 절감하며 많이 위축되었다. 그러던 중 딸이 학부모 독서모임 모집 공고를 가져왔다.


 책을 좋아해서 간간히 읽고는 있지만, 엄마들의 독서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였다. 엄마들이 책 자체보다 아이 학교 생활에 대한 정보와 친교를 위해 모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내가 무슨 말 하나 잘못하면 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됐다. 앞서 수영장에서 아줌마 세계를 호되게 체험하고 나니, 학부모 모임은 더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망설이다 해보지도 않고 기회를 놓칠까 싶어 신청서는 제출했지만, 첫 모임날까지 갈팡질팡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첫날, 학교 도서관으로 가니 생각보다 많은 엄마들이 모였다, 딸이 중3이라 뒤늦게 합류한 셈이 되는 나는 아는 얼굴 하나 없었지만 말이다. 아이가 졸업하면 엄마 독서회도 당연 졸업을 하게 되는 시스템이었지만, 3월의 첫 모임이다 보니 졸업생 엄마들도 인사차 참여했다고 했다. 역시 쉽지 않은 모임이었다. 하지만 여길 뛰쳐나가 하릴없이 스터디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두근대며 시작된 독서 모임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아이들이 졸업하면서 동네 카페로 장소만 옮겼고, 중간에 대학 문제로 몇 명이 빠져나가긴 했지만 그 명맥은 굳건하다. 하지만 한 달 한, 두 번의 독서 모임으로는 나의 책 욕심이 채워지지 않았다. 결국 여기저기 기웃대며 독서 모임을 늘려왔고, 이제 나는 문어발 같은 독서 모임 중독자가 되었다. 나도 가끔 헛갈리는 나의 독서 모임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 중학교 엄마 독서회- 위에서 한참 말한 그 최초의 독서 모임이다. 구청 지원을 받아 전시회, 미술관, 영화 등 다양한 활동을 같이 병행 중이다. 일 년에 한 번 독서 토론 발제와 후기를 모아 문집을 발행한다.


 2. 영어 독서 모임- 회사 다닐 때 같이 스터디를 했던 영어회화 친구들이 모였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은 독서 토론, 한 번은 소설 모비딕을 원서로 낭독하는 모임을 하고 있다. 모비딕이 너무 길고 어려워, 한 달 한 번 낭독으로는 아마 십 년 이상 걸릴 것 같다.


 3. 큰 도서관 독서회- 평일 저녁 줌으로 한다. 전문 강사님이 책도 선정해 주시고 발제도 맡아 주시니 아주 알차고 즐겁다. 20대 회사원부터 70대 할머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 중이라 다양한 시선을 배울 수 있다. 지금은 잠시 겨울 방학 중으로 올해 모임은 3월쯤 시작한다.

 

4. 작은 도서관 독서회- 우리 집이 큰 도서관과 작은 도서관 중간이라 두 개를 번갈아 이용 중이었다. 그러다 작은 도서관에도 독서회가 있다는 걸 알고 그냥 한 번 참관이나 해 볼까 하다 이제는 아주 발을 크게 담가 버렸다. 원래 한 달 한 번이었으나 이제 2주 한 번이다. 작년에는 맨부커상 수상작을 읽고 토론했고, 올해는 다양한 분야로 시선을 확장하기로 했다. 역사, 사회과학, 철학, 자연과학, 기술과학, 문학으로 범주를 나누고 각각 추천책을 모아 그중 몇 권을 선정했다.


 5. 숭례문학당 독서회- 도서관 독서회를 이끌어 주시던 강사님을 보고 숭례 문학당의 독서 토론 과정이 궁금해져 등록했다. 이제 막 입문 과정을 끝냈지만 앞으로 리더, 심화, 고급 과정까지 해볼 참이다.


 6. 여성가족플라자 독서회- 여성가족플라자에서 글쓰기 수업을 받다가 독서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50이 넘은 내가 막내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지만 어른들의 고견을 듣는 것도 재미있다. 여성가족플라자에서 여러 가지로 지원을 해주시고, 한 달 한 번 모임이라 부담 없다.


 자. 이렇게 공식적으로 6개의 독서 모임에 참여 중이다. 어떤 날은 한 주에 4개의 모임이 몰리기도 하니 일정을 잘 챙기지 않으면 큰일 난다. 게다가 얼마 전 작은 도서관 독서회의 두 친구가 또 다른 모임을 제안했다. 도대체 거절을 못 하는 나는 덜컥 ‘예스’라고 대답해 버렸고, 강신주의 감정수업에 나오는 모든 소설을 한 달에 한 번씩 읽고 토론하기로 했다. 자그마치 48편이니, 4년의 프로젝트이다.


 이 정도면 나는 진짜 독서 모임 중독자이다. 하지만 내가 이 지독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책을 통해 지혜를 배운다고들 하지만, 나는 책을 통한 대화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알아채지 못한 책의 행간, 교훈, 감정, 서로의 경험 등 혼자서는 도저히 깨우칠 수 없는 많은 것을 다른 이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탁자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 남편은 꼭 한 마디씩 한다.

 

‘책을 읽으면 뭐 하냐.’


 아마도 그 뒤에 덧붙이고 싶은 말은 ‘성격은 그대로다. 변한 게 없다. 발전이 없다.’ 뭐 그런 류일 것이다. 하지만 일 년에 책 한 권 안 읽는 독서 무식자가 나를 이해할 순 없다. 독서 모임 해 본 사람만이 아는 나를 든든히 받쳐주는 책들의 교훈을 되새기며, 독서 교양자인 나는 지긋이 남편을 째려본다.


그것이 내공이 충만한 독서 모임 중독자의 관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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