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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츠심 Jun 18. 2021

와인 한 병에 대한 의무감

그 의무감은 숙취를 부르고

21년 6월 17일 목요일

어김없이 맑고 푸른 하늘은 밖으로 나오라고 유혹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하노이 사우나는 오늘도 정상 운영합니다.



 지난밤 오랜만에 와인을 마셨다. 늘 마시던 맥주는 이제 살짝 지겨울 만큼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그 한 모금 한 모금이 참 소중하고 맛있게 느껴졌는데 나는 간사하게도 익숙함에 속아 그 소중함을 잃었다. 잠시 맥주는 쉬어가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술은 한잔 마시고 싶은 날이었기에 냉장고와 찬장을 열어 두리번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보드카는 나를 빨리 차가운 얼음에 담가달라고 말했지만 오늘은 너의 깊고 독한 목 넘김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오늘은 조금 달달하고 싶었다. 가벼운 목 넘김을 원했다. 찬장 한편에 우둑하니 서 있는 와인을 바라보며 은은한 단맛을 입안 가득 머금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와인을 꺼냈다.


 처음 먹어보는 와인은 늘 설렌다. 어떤 향일지, 어떤 맛일지, 내 입맛에 잘 맞을지 기대를 하며 코르크를 연다. 병을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은은한 단 냄새와 더불어 그리 독하지 않은 술임을 알 수 있는 미묘한 뉘앙스가 풍겼다. 좋은 예감이 들었고 빠르게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나쁘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느낌과 잘 맞아떨어지는 적당한 와인이었다.


 와인잔을 잘 깨 먹는 나는 집에 와인잔을 두지 않는다. 용도에 맞춰 잔에 따라먹으면 더 좋겠지만 깨진 와인잔의 유리를 처리하는 일은 나를 지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와인에 대한 애정을 떨어트리게 한다. 어제도 어김없이 그냥 잔에 와인을 따랐다. 콸콸콸. 조금씩 따라먹는 것도 귀찮은 나는 와인을 가득히 따라 마셨다. 가득한 한잔, 또 가득한 두 잔.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내 잔에 가득 찬 와인은 비워질 생각이 없었다.





 톡 쏘는 탄산처럼 가벼운 취함을 가져다주는 맥주에 익숙했던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느린 묵직한 술기운이 반가웠다. 오랜만에 만난 그와 악수 정도만 하고 헤어지려고 했는데 그 반가움은 쉽사리 그를 보내줄 수 없었다. 이내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후에 깊은 포옹을 하고 나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그를 보내줬다.


 반가운 마음이 넘쳐흘렀던 밤은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간 줄 알았던 그는 내 곁에 남아 내 관자 머리를 꾸욱 누르고 있었다. 아파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내 온몸을 눌렀다. 나는 일어날 수 없었고 한동안 누운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난밤 모든 것을 앗아간 것에 대한 그의 복수일까? 나는 그의 모든 것을 가진 죄로 그의 묵직한 무게를 이겨내야 했고 덕분에 하루 종일 시름시름 앓았다.


 가벼운 악수를 끝으로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 될 것을, 나는 또 질척거리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질척거림이 불편했던 그는 복수를 했고 나는 흔쾌히 당해주었다. 그의 복수로 인해 아침부터 괴로움에 혼쭐났지만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는 잘못이 없다.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나의 의무감이 잘못이니 말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와인 한 병에 대한 이 의무감은 당최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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